[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3) 마가는 무엇을 보았는가?

입력 2012-01-12 21:11


사도 바울과 전도여행 도중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이유는…

AD 46년 외삼촌 바나바와 그의 동료 사울을 따라 안디옥으로 간 마가는 이듬해인 AD 47년 그들의 선교 여행에 따라나섰다. 그들의 첫 선교지는 구브로(키프로스)였다. 그들은 안디옥의 외항인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의 살라미로 건너갔다.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 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행 13:5)

살라미를 출발한 그들은 섬을 횡단하여 바보(파포스)에 이르렀다. 헬라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앞 바다의 물거품 속에서 태어났다는 항구도시였다. 거기서 총독 서기오의 측근이었던 마술사 엘루마의 방해가 있기는 했으나 사울의 능력으로 그를 물리치고 전도하여 오히려 총독 서기오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그들은 다시 배를 타고 밤빌리아의 항구 버가(페르게)에 상륙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그 버가에서 마가는 그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말하자면 겟세마네 이후 마가의 두 번째 ‘도망’이 된 셈이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행 13:13)

마가는 왜 그들로부터 이탈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것일까? 전도 여행이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주석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기록으로는 살라미에서 바보까지 큰 박해나 고난이 별로 없었고 오히려 비교적 순조로운 편이었다. 앞으로의 여정이 걱정되어서 돌아갔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버가에서부터는 비시디아 산지를 넘어야 하는데 그곳은 가끔 산적이 출몰하기도 하는 위험지역이었던 것이다. 마가는 그것이 두려워서 도망쳤던 것일까?

그가 겟세마네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칠 때에는 그의 나이가 아직 십대였던 17세 정도였을 것이라고 필자는 추측한다. 그 이상 된 어른이 벌거벗은 몸에 겉옷만 걸치고 겟세마네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버가에서 일행을 이탈한 때는 겟세마네 당시로부터 이미 17년이 지났고, 마가는 34세 정도의 나이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겁이 많다고 하더라도 34세나 된 남자가 아직 닥치지도 않은 고난에 겁을 먹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것인가?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신 33:11)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과 작별할 때 레위 지파를 그렇게 축복했다. 레위 자손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맡은 자로 자부심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왔고 그런 기질은 마가의 부모와 그의 외삼촌에게도 여전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하고, 성령의 강림을 체험한 자들은 세상의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

전에는 가야바의 집 여종 앞에서도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부활하신 그분을 만나고 성령을 받은 후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 앞에서 그렇게 말할 정도로 담대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마가는 어떻게 된 것인가? 겟세마네에서 도망친 후에 진행된 일들을 그는 어디까지 목격했고, 어느 단계까지 체험했던 것일까? 필자는 그가 아무것도 못 보고, 몰랐던 것이라고 추정한다. 겟세마네에서 도망친 후 그의 행적을 시간을 역주행하면서 더듬어 보자.

부활하신 예수께서 무덤을 열고 나오셨을 때 먼저 그분을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고(요 20:16), 그녀와 함께 무덤에 갔던 여인들도 그분을 뵈었다(마 28:9). 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그분을 만났고(눅 24:13), 숨어있던 열 제자에게 그분이 나타나셨으며(요 20:19), 도마가 포함된 열한 제자에게 다시 나타나셨고(요 20:24), 그 후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일곱 제자를 만나셨으며,(요 21:5) 그리고 그분이 승천하실 때에는 500여 명이 그분을 보았다.

“그 후에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고전 15:6)

필자가 보기에 마가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고, 감람산의 500여명 중에 들어 있지 않았고, 그의 집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120명 중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이방에서 온 형제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열변을 토해 3000명이 세례를 받을 때에도(행 2:41) 거기 없었고,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성전 미문 앞에서 만나 일으켜 걷게 한 후 다시 그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5000여명이 믿게 되었을 때에도 그들 가운데 없었다. 그렇다면 마가는 그런 일들 중에서 어디까지를 보았던 것일까?

겟세마네에서 도망쳐 돌아온 후 그는 다른 제자들처럼 숨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는 예수의 제자도 아니었고, 그분의 추종자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분과 제자들의 저녁 식사를 위해 다락방을 빌려 주었던 집의 아들이었을 뿐이었다. 더 이상 숨어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예수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밖으로 나가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가 사형 판결을 받고 골고다로 끌려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가지 기적을 보여 주었다는 예수가 어떤 것을 보여 줄지 궁금하여 관정 쪽으로 달려갔다.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막 15:20)

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슬픔의 길(비아 돌로로사)’이 시작된다. 피투성이가 된 처참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고 걸어나오는 그의 모습을 보고 마가는 얼굴을 찡그렸다. 필자가 쓴 장편소설 ‘아들의 나라’에서 장사꾼으로 변장하고 예수를 따라다니던 황제의 정보원 누마는 그런 예수의 모습을 보며 탄식한다.

“저분이 사두개당이든 바리새당이든 아니면 셀롯당이든 엣세네당이든 어느 한 군데만 들어갔어도 이런 일은 당하지 않는 건데….”

그 말을 듣고 정보장교 스타쿠스가 중얼거린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느 당엘 들어가겠어?”

마가 역시 아무런 기적도 보여주지 못하고 넘어지는 예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마 군인이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그분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고 골고다를 향해 올라가자 마가는 더 이상 따라가지 않고 돌아섰을 것이다. 성경에서는 골고의 현장 어디에서도 마가의 모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후에 마가는 어디로 갔을까? 부활한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기 전에 그는 예루살렘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마가복음을 뒤적거리며 그의 흔적을 찾아내려고 애쓰던 필자는 문뜩 마가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읽으며 깜짝 놀라게 되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 16:20)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표현 방법이었다.

“이렇게 확실히 증명하였다.”

그것은 모든 수학 정리들이 논리적으로 중요한 원리들에 의해 증명된다고 말한, 유클리드(BC 325∼270)가 늘 사용하던 말이다. 오늘날까지도 모든 수학자들이 증명을 끝낸 후 ‘증명의 수학자’ 유클리드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말미에 ‘Q.E.D.’를 써 넣고 있다. 그것은 라틴어 ‘Quod Erat Demonstrandum’ 즉 ‘이렇게 확실히 증명하였다’의 약자인 것이다. 왜 마가는 그가 기록한 복음서의 말미에 이 말을 써 넣었던 것일까? 필자는 눈을 크게 떴다.

“마가는 수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면 헬라어로 기록된 마가복음의 문체는 너무나 뚜렷하게 수학적 문체이다. 학자들의 말대로 마가는 베드로의 구술을 받아 마가복음을 기록하였으므로 마가복음의 문장은 베드로의 성품을 닮아 박력있고 간결한 문체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기록한 마가 자신이 수학을 공부한 사람이어서 문장이 그토록 간결하고, 꼭 필요한 어휘와 핵심적인 자료만을 사용해 마가복음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마가는 어디서 수학을 공부했던 것일까?

“알렉산드리아!”

당시 유대인들이 유학가기 좋은 학문의 도시가 바로 알렉산드리아였다. 그곳은 또한 저명한 수학자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했던 것이다.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