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권태일 (9) 가난 속에 깨달은 진리 “가난할수록 더 나누라”

입력 2012-01-11 18:04


육교에서 구걸을 하는 그 아주머니의 사연이 참으로 기구했다. 사고무친의 고아로서 시골로 시집 가 아이 둘을 낳고 쫓겨났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 얼굴에 큰 화상을 입은 뒤 그렇게 된 것이다. 두 아이를 의탁할 곳이 없었던 아주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했다. 그리고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내 삶의 목표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그토록 내가 하고 싶어 하던 새로운 삶의 목표가 선명히 보였다. ‘그래 이들을 위해서 살자.’ 이때부터 시간만 나면 쌀과 반찬거리를 사들고 그 아주머니를 찾아갔다. 그러던 중 마음 한 구석에 ‘이 아주머니와 같이 어처구니없이 어려운 이들이 어찌 이 사람뿐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시 세일즈맨 4년 반을 넘을 즈음 그날그날 입에 풀칠을 할 정도였다. 교회를 다시 나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주머니를 만났다. 이 일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보호하심이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순간부터 나의 꼬인 세상 일이 한 가닥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니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시 73:28)라는 말씀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았다. 당시 나는 오늘 벌어서 이 집 도와주고, 내일 벌어서 저 집 도와주는 일을 했다. 사회복지 용어로 ‘재가복지’를 하게 된 것이다. 정부나 어느 기관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그 일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소위 돕는 일에 미쳤다. 마약을 한 번 먹으면 뭐가 뭔지 모르고 두 번 먹으면 얼떨떨하고 세 번 먹으면 중독이 된다는데, 나는 화상 입은 아주머니를 시작으로 한 번 돕고 두 번 돕다 보니 그만 나눔에 중독이 되어버렸다.

나는 봉지쌀을 사다 먹으면서 다른 집에는 쌀을 한 말씩 사다 주었다. 그래도 그 일이 그렇게 좋았다. 주위에서는 “제 치다꺼리라도 제대로 하지”라며 비웃었지만 나는 전혀 상관치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화상을 입은 아주머니를 만나면서 내 혼을 완전히 고정시키셨다. 왜 그렇게 힘이 나고 재미있는지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주일이면 보육원 아이들에게 빵을 사주거나 용돈을 주면서도 기쁨을 쌓아 나갔다.

약 2년 동안 어려운 이들을 찾아가서 나누는 재가 복지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월세방을 살던 집 주인이 “이 근처에 어려운 할아버지 한 분이 있는데 도와줄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즉시 만났다. 노인의 사정이 딱했다. 친자식이 없어 들인 양아들이 효도는커녕 사업을 한답시고 재산을 있는 대로 다 탕진해버렸다. 결국 이리저리 떠돌던 노인은 인천 일신동 지하방에서 생활하다 그마저도 여름 수해로 물에 잠겨 버렸다. 돕는 일에 불이 붙은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일신동 재개발구역 인근의 비닐하우스를 35만원에 구입해 노인의 거처로 만들어 주었다.

꽃이 피면 벌과 나비가 달려드는 법인가. 그 노인이 생활하는 곳에 여기저기서 어려운 사람들이 몰려들어 자연스럽게 가족이 되었다. 지금 운영하는 여러 시설의 모태인 ‘즐거운 집’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거처 없는 노인, 장애인, 고아 등이 어울려 생활했다. 당시에는 사회복지라는 용어조차도 모르고 그냥 저들의 고통을 만분의 일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일을 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나의 일과는 1인 3역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