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돈 봉투’에 묻혔던 ‘보수 삭제’ 논란 재점화

입력 2012-01-11 18:29

‘돈 봉투’ 사건으로 비틀거리는 한나라당의 비상대책위원회가 11일 당 정강·정책 개정 초안에서 ‘보수’ 용어를 삭제한 것으로 일부 언론에 보도되면서 계파를 불문하고 곳곳에서 파열음이 하루 종일 터져 나왔다. 지난 4일 김종인 비대위원의 제안으로 촉발된 논란이 돈 봉투 파문에 묻혀 진정되는가 싶더니 일주일 만에 폭발한 것이다. 당은 즉각 부인하고 나섰지만 보수 삭제 방침을 철회한 것은 아니어서 불씨는 계속 남아 있다.

일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정강·정책 개정 소위 초안에는 ‘보수’와 ‘선진화’ ‘포퓰리즘에 맞서’ 등의 표현이 빠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신 공정경쟁, 공정시장, 분배정의 등이 강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는 “보수 표현을 빼는 대신 자유주의, 시장경제 바탕, 안보 등의 내용을 그대로 담아 보수 가치를 충분히 살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친이명박계를 중심으로 강력 반발했다. 홍준표 전 대표는 “뭔 보따리장수들이 들어와 주인들을 다 휘젓고 다니느냐”고 힐난했고 쇄신파 정두언 의원은 트위터를 통해 “사람이 문제지 정강정책이 무슨 문제냐. (보수 표현 삭제는) 웃기는 짓”이라고 비난했다. 친이명박계 한 의원도 “당의 기본 가치를 부인하겠다는 것”이라며 “현 정부와 인위적으로 차별화하기 위해 보수도, 선진화 용어도 빼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친박근혜 진영의 최경환 의원마저도 “한나라당은 역사가 오래된 정당이고 그런 보수의 가치를 보고 모인 당원들도 많은 만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와 함께 당원들의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파장이 커지자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까지 진화에 나섰다. 박 위원장은 이날 오후 강원도당 신년인사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오보”라며 “정강정책에 관한 건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영철 대변인은 서면 브리핑을 통해 “보수 삭제 초안은 전혀 만들어진 바 없다”고 부인했고 정강정책개정소위 위원장인 권영진 의원은 소위 회의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보수 삭제 초안은 나도 보지 못했다”며 “보수 표현을 뺄지 여부를 결론 내려면 여론 수렴도 해야 하고 2∼3주 이상 더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논의가 숙성되기 전까지는 회의 내용도 따로 발표하지 않겠다”며 “위원장인 내가 얘기 하지 않는 건 추측이거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라고 파문을 진화했다.

하지만 비대위의 속내는 여전히 ‘보수’ 삭제에 가 있는 분위기다. ‘뼛속까지 쇄신’을 하겠다는 마당에 ‘보수 삭제’는 쇄신의 상징성이 크다는 판단이다. 여론도 삭제 편에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얼미터가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보수’의 삭제에 찬성하는 의견이 54.6%로 반대의 17.6%보다 월등히 높았다. 특히 보수 성향의 유권자 층에서 44.4%, 한나라당 지지층에서 49.9%가 찬성 의견을 보인 만큼 비대위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쇄신책이 아닐 수 없다.

정재호 기자 j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