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재그 철길 따라 오르락 내리락 여유와 긴장 속 태백산맥 넘었는데… ‘사라지는 스위치백 철도’
입력 2012-01-11 17:51
강원도 태백 통리역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강릉행 무궁화호 열차가 기적소리와 함께 플랫폼을 떠난다. 탄광촌의 ‘검은 추억’을 찾아 나선 승객들이 하얗게 얼어붙은 통리역 선로를 종종걸음으로 건너고, ‘푸른 추억’을 만들기 위해 바다로 떠나는 연인들은 입김 서린 차창에 하트를 그리며 블랙홀 같은 터널 속으로 빨려든다.
통리역에서 심포리역까지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허리를 ‘ㄹ’자로 에둘러 달리는 산악철도가 개통되던 1963년 5월 20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통리역 구내에서 침목과 궤도를 연결하는 골드스파이크를 박았다. 서슬 퍼런 최고 권력자가 오지를 찾아 금빛 찬란한 골드스파이크를 박을 정도로 영동선 산악철도 개통은 한국 철도사에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세간에서는 도금한 골드스파이크를 두고 진짜 황금 논란을 벌였을 정도.
통리역에서 삼척 도계역까지 17㎞를 달리는 산악철도와 스위치백 철도 구간이 이제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오는 6월 태백 동백산역과 도계역을 나선형으로 연결하는 16.2㎞의 솔안터널이 12년 6개월 만에 완공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빛의 속도로 살아가는 현대라지만 겨울에는 설국으로 변하고 봄에는 꽃동산을 연출하는 태백산맥을 더 이상 기차를 타고 넘을 수 없게 된다는 현실 때문인지 기적소리에도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통리오일장으로 유명한 통리는 태백시 동쪽 끝자락으로 삼척 경계지역. 골짜기 지형이 여물통같이 생겨 통리라는 지명이 붙었다.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동해안을 오가려면 해발 720m 높이의 통리재를 걸어서 넘어야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시절에 태백과 삼척에 탄광이 개발되면서 석탄을 수송하기 위해 철도가 부설되고 통리재와 통리협곡은 탄가루를 뒤집어 쓴 증기기관차의 거친 호흡소리로 하루 종일 시끌벅적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험준한 태백산맥 산허리를 조심조심 달리는 산악철도가 개설되기 전까지는 통리역에서 쇠줄로 심포리역에 도착한 기차의 기관차와 객차를 분리해 한 량씩 끌어올려야 했다. 1㎞ 남짓 떨어진 통리역과 심포리역의 표고차가 250m로 가팔라 기차가 오르내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 기차를 끌어올리던 인클라인 철도(강삭철도)는 사라졌지만 통리역에는 ‘마끼다리’로 불리는 시멘트 구조물이 폐허처럼 남아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차창 밖으로 탄광도시 도계를 비롯해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봉우리들이 파노라마 풍경화를 그리며 스쳐 지나간다.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금세 빠져나오기를 반복한다. 통리역에서 도계역에 이르기까지 터널은 모두 17개. 빛과 어둠의 공간을 교차하던 기차가 미인폭포 옆을 지나 통리협곡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심포리역에서 교행을 위해 잠시 멈춘다.
그 옛날 심포리까지 기차를 타고 온 승객들은 객차가 쇠줄에 의해 끌려 올려지는 동안 인클라인 철도 옆으로 난 가파른 비탈길을 1㎞ 이상 걸어 올라야 했다. 사람과 짐을 지게에 싣고 오르내리는 짐꾼이 생겨나고 겨울에는 새끼줄 장수도 등장했다. 새끼줄은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신발에 칭칭 감아 아이젠 대용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인클라인 철도와 스위치백 선로의 출발점인 심포리역에는 미인폭포 진입로 쪽에서 보면 은하철도 999 발사대를 연상시키는 녹슨 철로가 살짝 보인다. 기차가 산허리를 돌아 하늘로 솟아오르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철로는 브레이크 고장 등에 대비해 기차를 대피시키는 대피선.
심포리역을 출발한 기차가 속도를 줄이더니 드디어 스위치백 철도 구간의 상부역인 흥전역에 진입한다. 스위치백(switchback)은 기차가 급경사 구간을 달리도록 지그재그 형태로 놓인 철길. 양쪽에 상부역과 하부역이 있고, 그 사이를 기차가 전진과 후진을 반복해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산악철도의 백미로 꼽힌다.
기찻길은 흥전역 입구에서 내리막과 오르막 두 갈래로 갈라진다. 오르막은 상행선, 내리막은 하행선으로 반대방향 선로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기차가 산중턱에 위치한 흥전역에서 후진으로 선로를 갈아타기 시작한다. 날카로운 쇠 마찰음이 허공에서 동심원을 그리다 병풍 같은 산에 가로막혀 메아리로 되돌아온다. 흥전역에서 스위치백 철도의 하부역인 나한정역까지는 1.5㎞. 차창 밖으로 도계읍 시가지와 산더미 같은 석탄 야적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한정역은 38번 국도와 가까워 흥전역보다 접근하기가 쉽다. 폐쇄를 앞둬 더욱 쓸쓸한 나한정역의 명물은 흥전역으로 가는 S자 모양의 단선 철로. 곡선미가 돋보이는 철로 옆으로는 3.3㎞ 떨어진 도계역을 연결하는 철로가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하듯 후진을 거듭하던 열차가 드디어 나한정역에서 선로를 바꿔 똑바로 달리기 시작한다. 차창 밖을 통해 해발고도가 낮아지는 풍경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승객들이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쉰다. 통리역에서 나한정역까지 13.7㎞를 살얼음판 걷듯 조심조심 내려온 기차도 신이 난 듯 서서히 속도를 높인다.
오십천을 가운데 두고 38번 국도와 나란히 달리는 영동선은 한국의 그랜드 캐니언으로 불리는 통리협곡을 달린다. 왼쪽으로는 방금 내려온 스위치백 구간이 등고선을 그리며 통리재를 오르고, 오른쪽의 육백산 자락에는 도계탄광에서 캐낸 검은 석탄이 산더미처럼 쌓여져 있다.
석탄 싣는 화물열차가 즐비하게 늘어선 도계역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급수탑과 기찻길이 산꼭대기까지 수직으로 뻗어 있는 광차용 인클라인이 눈길을 끈다. 급수탑은 증기기관차에 물을 보충해주던 시설이고, 광차용 인클라인은 갱도에서 캔 석탄을 선탄장까지 운반하는 탄광 설비.
증기기관차와 인클라인 철도에 이어 산악철도와 스위치백 철도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 영동선 통리역∼도계역 철도가 마지막 겨울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태백·삼척=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