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민 목사의 시편] 원숙함의 깊이

입력 2012-01-10 17:52


깊이를 추구하는 사람은 원숙함의 경지에 이르기를 갈망한다. 생명이란 태어나서 성장하고, 성숙하고, 원숙해진다. 성장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성숙함에 이르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또한 성숙에서 원숙함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많지 않다. 씨앗을 땅에 뿌렸다고, 다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다.

연어 한 마리가 낳는 알이 대략 삼천 개 정도다. 그 중에 대부분은 다른 고기에 의해 먹히고, 그중에 아주 소수만 바다로 나가서 성장한 후에 모천으로 돌아오게 된다. 모천으로 돌아오는 연어는 삼천 개의 알 중에서 단정하긴 어렵지만 대략 세 마리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모천으로 돌아온 연어들은 모천에서 알을 난 후에 죽는다. 한 마리 연어가 태어나 자신의 몫을 다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인간으로 태어나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생명의 탄생은 놀라운 일이다. 수많은 경쟁을 뚫고 태어나서 어른이 되기까지 생존한다는 것 자체도 경이롭고 축하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그냥 생존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거쳐 원숙함의 경지에 이르기를 갈망한다.

원숙이란 단어 속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원숙은 인격과 지식이 깊고 원만함을 의미한다. 원숙함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경지가 아니다. 원숙(圓熟)이란 말 속에 ‘숙’(熟)은 곡식이 무르익는 것처럼 무르익음의 경지를 뜻한다. 충분히 익힌 경지, 충분히 숙달한 경지를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원숙은 매우 숙련되고 능숙한 경지를 의미한다. 자신의 분야에 통달한 경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원숙은 전체를 보고, 멀리 보고, 깊이 보는 경지다. 원숙함에 이르면 말이 적어진다. 왜냐하면 눈앞에 전개되는 현상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앞날을 미리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숙함에 이르면 통찰력이 깊어지고, 앞을 내다보는 예견력이 탁월해진다.

원숙함이란 계절의 변화와 조화 속에서 이뤄지는 절묘한 경지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원숙함의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는 지혜가 있다. 무게가 있다. 깊이가 있다. 최상의 원숙함은 늘 새로워지는 것이다. 날마다 새롭지 않으면 원숙함이 아니라 고루함이 된다. 과일은 익는 순간 상하고 썩게 되어 있다. 그래서 빨리 나누어야 한다. 원숙함은 나눔이다. 나눔을 통해 새로 태어나고, 나눔을 통해 영향력을 넓히는 것이 원숙함이다. 생존은 귀한 것이지만 생존에 머물지 말고 성장을 추구하자. 또한 성장에 만족하지 말고 성숙과 원숙함에 이르기를 갈망하자.

(LA새생명비전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