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권태일 (8) 고난속에 핀 꿈… 소외이웃 위한 ‘사랑의 국민마을’
입력 2012-01-10 21:59
9년간 세일즈를 했는데 4년 반 동안은 참으로 힘들었다. 제대로 끼니를 때울 수 없을 정도였다. 초창기에는 빚 때문에 아내를 친정에 보내고 경기도 성남에서 도피 생활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마음속에선 국회의원이나 사업가가 돼 ‘사랑의 국민마을’ 이라는 소외된 이들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 자라나고 있었다.
당시 아내는 나를 정신이 나간 사람으로 여겼다. 흰 종이에 이곳에는 양로원, 저곳에는 정신개조원, 다시 이곳에는 청소년수련원 등을 그려주며 꿈을 얘기하는 내 모습이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당장 끼니도 해결하지 못할 뿐더러 빚 때문에 도망 다니고 있는 신세에 웬 얼토당토 않은 꿈인가 말이다. 아내 눈에는 그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 나에게는 문제 되지 않았다. 나는 그 꿈을 향해 줄기차게 앞만 보고 달릴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품었던 나누며 살겠다는 마음이 든든한 기초가 되어 요지부동이었다. 실제로 흰 종이에 그린 꿈이 비전이 되었고 그 비전은 하나하나 실체로 눈앞에 만들어져갔다. 사도 바울이 천국을 향하여, 푯대를 향하여 전진하는 것처럼 오직 앞만 보고 달렸다. 지난 시간들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나는 한 가지씩 차근차근 이루어내는 기쁨으로 어느덧 23년을 가볍게 올 수 있었다.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고 엄정하다. 그분은 수많은 훈련을 시키신 후 쓰신다는 사실을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고 무릎을 치게 된다. 세일즈맨으로 4년을 지냈을 즈음 나는 소위 나일론 신자로 전락했다. 군대에서 지녔던 불같은 믿음이 세상으로 빠져들면서 교회와 담을 쌓고 지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나의 마음을 한 순간 회전시켜 이끌어내시는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어느 날 문득 교회를 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 복음서점에서 톰슨성경을 사서 큰딸 효정이를 데리고 인천 부개동에 있는 작은 교회에 갔다.
교회에 들어가 앉아 고개를 숙이는 순간 “목사가 되라”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처럼 또렷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럴 환경이 아니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나에게 목사가 되라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때부터 다른 기도를 하려고 하면 도저히 기도가 되지 않았다. 그 날부터 예배 때면 시작부터 끝까지 졸다가 와야 했다. 무려 3개월이나 지속되었다.
축도 때 겨우 깨어서 나오다보니 목사님 보기가 민망해서 그 교회에 출석할 수가 없었다. 믿음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작은 개척교회에서 2년 동안 출석하다가 당시 살고 있던 인천 일신동 보육원의 교회에 나갔다. 그곳에는 아이들만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마음이 움직였다. 지난 날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나의 작은 꿈이 솔솔 피어났다.
1986년 11월초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결정적 사건이 생겼다. 무심코 그리고 조용히 일어난 사소한 일이 발단이 됐다. 안마기 세일즈를 마치고 서울 충무로에서 명동으로 연결되어 있는 육교를 넘다 구걸을 하고 있는 한 여자를 보았다. 박스를 깔아놓은 채 한 아이를 재우고 한 아이는 품에 안고 고개를 푹 숙인 엄마였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아주머니, 왜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왔습니까?” 묵묵부답의 여자는 고개만 더 깊이 숙였다. 가까운 매점에서 음료수와 빵을 사가지고 와서 재차 물었다.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돕고 싶어서 그럽니다.” 비로소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