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펴낸 이어령 전문화부장관 “생명의 양식 성경, 神學이 아닌 詩學으로 읽어라”

입력 2012-01-10 17:48


책을 읽으면서 ‘이래서 이어령이 이어령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도대체 ‘이 시대의 지성’ 이어령의 창조적 생각이 미치지 못할 영역이 어디일까. 지난 반세기 동안 문학과 문화, 시대를 읽어 내려간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성경마저 텍스트로 삼았다. 이 책은 ‘이어령식 새로운 성경 읽기’의 맛을 조금 보여준 책이다. ‘조금’이라는 말을 첨가한 것은 앞으로도 그가 성경 읽기와 관련한 다양한 책을 낼 것 같아서다.

나는 성경의 여러 주제를 다룬 이 책 전반에 흐르는 키워드를 ‘시장(市場)의 언어’로 보았다. 영성의 거장 유진 피터슨 목사도 시장의 언어를 이야기했다. 피터슨이 성경을 현대어로 해석한 ‘메시지(Message)’를 쓴 것도 모든 사람들이 쉽게 쓰는 시장의 언어로 성경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전 장관은 책에서 여러 성경구절을 제시하면서 그 나름의 해석을 하고 있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인사이트는 일반인들은 물론 메시지 전달을 업으로 하는 설교자들의 기마저 질리게 할 것 같다.

그가 주장한 것은 피터슨과 마찬가지로 ‘쉬운 성경읽기’다. 성경은 지식인들에게만 통용되는 고급 언어가 아니라 ‘시장의 언어’로 해석돼야 한다. 그래서 이 땅 사람들 누구나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 장관은 말한다. “기독교나 성경을 너무 어렵게 설명하면 접속하려던 사람들도 나가떨어지고 맙니다. 예수님은 학식 있는 사람들에게만 설교하지 않으셨어요. 예수님은 어부나 창녀들처럼 소외된 민중들,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한테 쉽게 설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걸 접근도 하지 못하게 어렵게 설명합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책의 부제인 ‘이어령 바이블 시학’이 여기서 나왔다. “신학(神學)에서 ‘ㄴ’ 받침 하나만 빼면 시학(詩學)이 되지 않습니까. 시를 읽듯, 소설을 읽듯이 성경을 읽으면 어렵던 말들이 더 가까이 다가올 것입니다.”

이 전 장관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마태복음 4장 2절부터 4절까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빵과 떡의 차이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빵’을 한국 식문화에 적용, 그 외형이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한 떡으로 번안한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제유법(Synedoche)을 모르고 성경을 읽게 되면 그 모양만 보고 빵을 떡으로 잘못 번역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제유법이란 단어조차도 어렵긴 하다. 성경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수사학을 알아야 하며 인류 문화와 역사의 DNA를 이해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아무튼 그는 이 빵과 떡의 문제뿐 아니라 ‘탕자의 이야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낙타와 바늘귀’ 등 다양한 성경 속 이야기들을 ‘이어령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 ‘풀어냄’이 탁월하다. 미국의 기독교 지성인 풀러신학교의 리처드 마우 총장은 수년 전 나와의 인터뷰에서 현대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렐러번스’(Relevance·적합성 혹은 연관성)가 가장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나는 렐러번스라는 측면에서는 이어령이 유진 피터슨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한다. 모든 면에 사통팔달한 그의 사고는 놀랍기만 하다. 물론 영적 깊이는 다른 문제다. 평생 영성의 세계에서 거닐었던 피터슨과 이제 지성에서 영성의 문지방을 살짝 건너고 있는 이어령의 영성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이 전 장관이 오직 영성 한 방면만을 천착했다면 세계의 어떤 영성가들의 것보다 더욱 깊은 내용이 나왔으리라. 그도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의 이 이야기를 꼭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신학이나 교리는 잘 몰라도 문학으로 읽는 성경, 생활로 읽는 성경이라면 내가 거들 수 있는 작은 몫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이 책을 내놓게 됐습니다.”

책을 찬찬히 정독하면 많은 정보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나는 목차상으로 9번째인 ‘접속하라 열릴 것이다’라는 글을 흥미롭게 읽었다. 종교는 영어로 ‘릴리전(Religion)’이다. 그 어원은 끊어진 것을 다시 잇는다는 뜻. 이 전 장관은 종교란 신과 인간의 단절된 관계를 다시 잇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에 따르면 목회자들이 설교를 하는 행위는 신도들과 하나님을 접속시키는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서 목사는 신도들을 하나님께 ‘접속’시켜야 한다. 설교가 과거에는 목사가 성도를 마주보면서 일방적으로 들려주는 것이라면 지금은 목사가 성도들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이들을 이끌어 스스로 하나님과 접속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전 장관의 주장이다. 이 전장관은 목사의 설교를 듣고 “목사님, 설교 참 잘 들었습니다”라고 하지 말고 “오늘 참 접속이 잘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컴퓨터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치면 가상현실의 사이버 세계로 접속되듯 목사는 키보드, 마우스가 되어 예배 시간에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접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인터넷의 사이버 세계와 하늘나라와는 비슷한 속성이 많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하늘나라를 설명하려면 사이버 세계의 원리를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늘나라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존재한다. 사이버 세계는 가상 세계다. 실체가 없다. 그럼에도 존재한다. 접속 아이디와 패스워드만 있으면 무한정 정보의 바다로 들어갈 수 있다. 물리적으로 갈 수 없는 세계에서 사람들도 만나고 소통도 한다. 하늘나라는 존재한다. 그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접속해야 한다. 이 전 장관은 하늘의 세계로 들어가는 크리스천의 접속 아이디는 ‘주 예수 그리스도’, 패스워드는 ‘할렐루야’와 ‘아멘’이라고 말한다. 접속을 방해하는 세력도 있다. 사이버 세계에 접속을 교란하는 버그(Bug)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마귀의 세력이 있다. ‘버그와 마귀’. 탁월한 대유가 아닌가.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만나려고 가고, 하나님께 접근하며 하늘나라에 접속하려고 가는 것 아닙니까?” 이 전 장관의 접속 이야기는 계속된다. 접속을 하면 우리는 가상세계와 커넥트(Connect·연결)된다. 커넥트는 중세 프랑스어로 ‘공격하다(Attack)’는 뜻. 접속, 접근 이라는 뜻인 액세스(Access)에도 공격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전 장관은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라는 세계에 접속하려면 낯설다고 머뭇거리지 않아야 합니다. ‘한번 해 보겠다. 다가가 보겠다. 공격해 보겠다’와 같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에는 깊은 영적 의미가 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전 장관이 ‘침노’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그가 말하는 접속, 커넥트, 액세스는 하늘의 세계를 향한 침노다.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커넥트하라. 용기 있게 접속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로도 표현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하늘나라가 사이버 세계와 비슷하다는 것을 인식하면 ‘할렐루야’나 ‘아멘’, ‘십자가’처럼 기독교에서 쓰이는 말이나 상징들은 하늘나라에 접속할 때 필요한 아이디, 패스워드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도란 무엇인가?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처럼 끝없이 접속하는 그 마음이 바로 기도다.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처럼 그렇게 아주 가까이 오늘 나는 기도를 드립니다. 저 영원한 빛과 소리에 접속하기 위해서, 주님의 비밀번호를 찾기 위해서 손을 모읍니다.”

한정된 신문 지면이 아쉬울 정도로 책에는 귀한 내용들이 많았다. 개인적 견해로는 그의 신앙 구도기라 할 수 있는 ‘지성에서 영성으로’보다 강렬하지는 않지만 콘텐츠는 훨씬 풍성했다. 일독을 권한다. 외국의 영성가들을 환호하는 우리 시대 기독교계에 이어령이란 인물이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어쩌면 이어령의 영성적 사유 작업은 지금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 그래서 집중이 필요하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전 장관으로부터 욥의 이 고백을 통한 더욱 절절한 믿음의 글이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다.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나오는 글, 창조적 생각을 뛰어넘어 그분이 보여주고 직접 말해 주시는 것을 받아 쓴 그 글이.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욥기 42장5절).

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