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김혜림] 다람쥐 쳇바퀴 돌리기
입력 2012-01-09 18:08
“어제도 그제도, 5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같은 소리만 하고 또 하고… 1년 전에도 그 얘기, 2년 전에도 그 얘기… 10년 전에도 그 얘기… 그놈의 여성, 여성, 여성.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 나고 신물 난다.”
한 독자가 보낸 메일이다. 여성 분야를 맡고 있는 기자를 조롱하기 위해 보낸 것이지만 불쾌하기보다는 100%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에 관한 한 수십 년 동안 동어반복을 하고 있다는 데 이의가 없기 때문이다.
여성계는 4월 총선을 앞두고 각 당에 공천 30% 여성 할당을 요구하고 있다. 정당들은 확답을 하지 않고 있다. 여성계의 여성 후보 공천 할당 요구가 본격적으로 나온 것은 5년 전도, 10년 전도 아닌 20여년 전이다. 1989년 지방자치제 실시를 2년 앞두고 전국의 여성지도자들이 모여 ‘20% 여성할당제 촉구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 총선 때마다 여성 할당을 요구해 왔다.
지난 5일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인재영입분과가 비대위 전체회의에 제출한 보고서는 세대·성별 인구 비례를 공천에 반영해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 243명 중 124명(51.4%)을 여성으로 공천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 중진 의원은 이에 대해 “코미디, 쇼” 운운했다지만, 이론상으로는 50% 이상 여성 후보를 공천해야 된다는 얘기이니 30% 할당 요구가 무리한 것은 아니다.
후진국 수준을 면치 못하고는 있지만 여성의 정치참여 분야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할당 20%에서 30% 요구로 숫자라도 바뀌었으니. 맞벌이 부부 가사노동 분담이나 평등 명절 쇠기 등 실생활과 관련된 여성들의 요구는 1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그 얘기가 그 얘기다.
한국여성개발원(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91년 전국 20세 이상 성인남녀 2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가사노동시간이 맞벌이 부부의 경우 아내는 하루 평균 4시간 31분인 데 비해 남편은 38분에 지나지 않았다. 같은 기관이 2009년 맞벌이 부부 253쌍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주중 가사노동시간이 아내 4시간 3분, 남편 34분이었다. 우리나라 남편들의 가사노동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해 29개국을 대상으로 조사 발표한 ‘요리, 육아, 그리고 자원봉사: 세계의 무상노동’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에서 꼴찌다.
평등 명절 쇠기는 90년대 후반부터 여성단체가 지침서를 내놓고 대대적인 운동을 펼쳤고, 여성가족부(당시 여성부) 출범 첫해인 2001년 ‘명절연휴, 아내도 쉴 수 있게 해 주세요’를 시작으로 ‘평등부부가 함께하는 새로운 명절문화 만들기’ 캠페인을 해마다 하고 있다. 하지만 벌써 설을 앞두고 ‘주부들 명절 스트레스 성형으로 푼다’ 등의 웃지 못할 기사들이 나오고 있다. 남편은 TV 앞에서, 아내는 가스레인지 앞에서 보내는 명절 풍경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름 모를 독자에게 답신을 보내려 한다. 10년째, 20년째 같은 얘기만 되풀이하는 여성들을 나머지 절반인 남성들이 도와 달라고. 이제껏 뒷짐 진 채 구경만 하던 남성들이 힘을 보태면 같은 소리만 되풀이하는 비생산적인 일은 멈춰질 수 있을 것이라고.
‘여성 국회의원 50% 육박’ ‘남편들 가사에 적극 동참’ ‘명절 처가에서 보내는 남성 급증’ 이런 새로운 얘기를 쓸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 지금까지처럼 참빗 같이 촘촘한 잣대를 들이대야 그 변화를 잴 수 있을 만큼 거북이걸음으로 바뀐다면 그런 기사를 읽을 기회도 없을 것 같아 걱정이다.
김혜림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