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샘] 찬 샘
입력 2012-01-09 18:08
書堂之南 도산서당 남쪽
石井甘冽 달고 시린 돌샘
千古煙沈 천년을 안개에 잠겼으니
從今勿冪 이제부터는 덮지 마오
이황(李滉) ‘도산잡영(陶山雜詠)’ 중 열정(冽井) ‘퇴계집(退溪集)’
퇴계는 환갑이 되던 1561년에 서당을 완성했다. 도산서당(陶山書堂)과 농운정사 두 채로 이루어진 아담하고 조촐한 산재(山齋)다. 5년에 걸쳐 차근차근 마련한 이 산속 서당에 퇴계는 은둔 선비의 운치를 약간 부렸다. 정우당(淨友塘)이란 조그만 못을 파고 연(蓮)을 심고, 매화와 대를 심어 절우사(節友社)를 만들었다. 또 서당 앞 맨 남쪽에는 찬 샘을 만들었다.
도산서당에는 ’몽천(蒙泉)’과 ‘열정(冽井)’ 두 개의 샘이 있었는데, 여기에 소개한 ‘찬 샘’은 그중 열정을 읊은 4언시다. 옛 선비들은 자신의 독서당에 샘을 꼭 두었다. 샘은 쉬지 않고 새물을 길어올리는 선비정신을 상징한다. 퇴계는 열정의 물을 마시며 시대의 정신을 길어올려 조선의 학문과 문화에 물을 댔다.
썩은 샘은 더 이상 샘이 아니다. 찾는 이가 없더라도 슬퍼하지 않고, 언제나 밑바닥을 쳐 맑고 시린 물을 길어올린다. 그럼으로써 예기치 않은 어느 순간, 갈증에 겨운 누군가의 목을 축여준다. 바로 ‘주역’에서 ‘우물이 맑고 시리기 때문에 그 물을 달게 마신다(冽寒泉食)’라고 한 의미이다. 정수물막(井收勿幕). 샘은 덮어두지 않고 늘 쳐서, 쉼없이 새 물을 길어올릴 때에야 비로소 제 생명을 지닌다.
시대를 앞서간 거인 다산(茶山), 그가 오랜 유배의 삶을 살았던 강진의 초당 뒤란에도 찬 샘이 있다. 다산은 거기에 손수 ‘열정’ 두 글자를 단정하게 새겼다. 자신의 호인 열수(冽?)에서 따 ‘다산의 샘’이란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이곳의 열정이 선비의 찬 샘이기는 퇴계와 다르지 않다. 다산 역시 초당의 찬 샘에서 새 시대의 정신을 길어올렸다.
먼 유배지의 뒤란에 선비정신이 준렬하다. 오늘, 덮어둔 내 마음의 샘 밑바닥. 탁한 물이 고이는 것을 덮어두고 있지는 않은가? 깊은 겨울. 시린 돌샘을 찾는다.
이규필(성균관대 대동문화硏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