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신창호] 블루 콤플렉스
입력 2012-01-08 18:22
19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이른바 ‘모래시계 세대’ 혹은 ‘386세대’는 이제 사십 줄을 훌쩍 넘었다. 그래도 이들의 정치적 지향은 여전히 ‘오른쪽’보다 ‘왼쪽’에 머물러 있다. 40대만이 아니라 30대와 20대도 그렇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집회 단골 참석자들이자 인터넷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의 열성 팬들이다. ‘부자와 전문직 종사자는 우파’란 속설도 통하지 않는다. 중견 법관과 의사들이 “한·미 FTA는 매국”이라고 외친다.
45년 해방 이후 90년대 초반까지 우리 사회엔 ‘레드 콤플렉스’가 횡행했다. 북한의 존재감, 그들이 일으킨 6·25전쟁의 아픔, 이런 것들이 국민 대다수의 정서에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레드 콤플렉스는 엄청난 부작용을 낳았다. 연속된 군사독재의 정신적 토대가 되는가 하면, 모든 반정부 인사들에게 씌우는 올가미 역할도 했다.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억압하는 횡포의 대명사 구실도 도맡았다.
2012년의 대한민국, 지금은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시장경제나 자유경쟁, 안보 같은 슬로건들은 ‘보수 꼴통’으로 낙인찍힌다. ‘2040 세대’는 이 논리가 어떤 깊이와 무게를 갖고 있는지 고민하기 전에 야유부터 퍼붓는다. 반면 좌파 논리는 세세히 검토되기도 전에 ‘개념 있고 훌륭한’ 것으로 우대받는다. 의사당 안에 최루탄을 터뜨린 국회의원이 영웅 취급을 받고, 욕설을 섞어가며 “닥쳐”를 외치던 전직 의원이 대법원 확정판결로 죄인이 됐는데도 오빠부대를 몰고 다닌다. 이쯤 되면 ‘블루 콤플렉스’라 할 만하다.
빌리 브랙이란 ‘의식 있는’ 영국가수가 있었다. 80년대 보수당 정권에 반대하던 ‘불온 좌파’였던 그는 94년 ‘집에선 이런 장난 치지 마세요’라는 앨범을 냈다. 음반 중엔 ‘붉은 색에서 푸른 색으로 바뀐 사나이’란 제목의 곡이 있다. 가족이 생기고 생계를 걱정해야 했던 브랙은 이 노래에서 “스무 살 때의 내 생각은 나 혼자 내 방에서 치던 장난과 같았다”고 고백했다. “붉은 색이던 내 머리 속 색깔이 서서히 탈색되더니 앞으로 내 아이와 아내를 어찌 책임질까 고민하는 순간 완전히 파랗게 변했다”고도 했다. 그해 영국 노동당수에 선출된 토니 블레어는 핏빛 당기를 내리고 핑크빛이 감도는 새 당기를 올렸다. 그때부터 영국 노동당은 정통 좌익 노선을 포기하고 좌우 수렴정책으로 전환했다.
언제쯤이면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해질까. 좌파의 붉은 색과 우파의 푸른 색이 서로 경멸하지 않는 시대 말이다.
신창호 차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