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45)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

입력 2012-01-08 18:16


초기신학,청교도적 범보수·복음주의 색깔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은 어떠했을까? 이 글에서는 초기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초기’를 한국인들이 적극적으로 신학활동에 참여하게 되는 1930년대 이전 시기로 한정하고자 한다. 적어도 1930년 이전까지의 한국교회의 신학은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평양의 장로교신학교는 1901년 설립되지만 신학교수들은 선교사들로 구성되었다.

비록 주한 4장로교선교부의 연합기관이었다고 하지만 북장로교 선교부가 신학교육을 주도했다. 특히 메코믹신학교 출신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한국인으로 신학교육에 참여한 첫 인물은 남궁혁 박사(南宮爀·1882∼1950)인데, 그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1927년 신약교수로 취임했다. 이듬해에는 이성휘 박사(李聖輝·1889∼1950)가 교수로 참여했다. 박형룡(朴亨龍·1897∼1978)은 1928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게 되지만 평양의 신학교에서 전임교원으로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는 1931년이었다. 송창근, 김재준이 귀국 한 것은 1933년이었다. 말하자면 한국인들이 신학교육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였다. 감리교의 ‘신학세계’가 창간된 때는 1916년이었다. 장로교의 ‘신학지남’은 1918년 3월 창간되지만 대부분의 필자들은 선교사들이었다. 창간 때부터 1920년까지는 왕길지(G Engel)선교사가, 1921년부터 1927년까지는 배위량(W M Baird)선교사가 편집인으로 일했다. 1928년 이후 남궁혁이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한국인에 의한 신학저술이 출판되기 시작한 것도 1930년대부터 였다. 최초의 학문적 연구는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사’(The History of the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로 1929년에 출판되었다. 박형룡의 ‘기독교 근대 신학난제선평’이 출판된 때는 1935년이었다. 감리교 정경옥의 ‘기독교신학개론’은 4년 뒤인 1939년에 출판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1930년대 이전까지는 선교사들이 한국 신학을 주도했고, 이때까지의 신학은 한국인들에 의한 ‘한국(적) 신학’(Korean theology)이라기보다는 ‘한국에서의 신학’(Theology in Korea)이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1930년 이전의 내한 선교사들의 신학은 어떠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다소 상이한 해석이 없지 않다. 어떤 이는 ‘철저한 근본주의’, ‘정통적 복음주의’, 혹은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청교도 개혁주의 정통신학’ 등으로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신학’으로 지칭되고 있다. 즉 1920년대까지 내한했던 선교사들의 신학은 대체적으로 보수적이며 복음적이었고, 전통적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WCF)를 따르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의 논평은 이 점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개국 이후 첫 25년간 내한한 선교사는 전형적인 퓨리턴(청교도)형의 선교사였다. 이들은 1세기 전 그들의 조상들이 뉴잉글랜드에서 했던 것 처럼 안식일을 지켰으며 술이나 담배, 그리고 카드놀이는 기독교 신자들이 빠져서는 안 될 죄의 요소라고 보았다. 신학과 성경 비평에 대해서는 그들은 철저히 보수적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했다. 그들은 또한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했다.”

1890년에 내한했던 마포삼열(Samuel A Moffett·1864∼1939)도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이 범 보수적인 신학이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즉 그는 1909년 첫 25년간(1884∼1909)의 한국선교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선교부와 교회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투철한 신념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믿는 열성적인 복음정신을 지녔다.” 그로부터 다시 25년이 지난 1934년에는 이렇게 말했다. 이때는 미국인에 의한 한국선교가 시작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오늘 어떤 신 신학자들은 나를 너무 보수적이라고 비난한다. (중략) 근래에 신 신학이니, 신 복음이니 하는 말을 하며 다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러한 인물을 삼가야 한다. 조선교회 형제여 40년 전에 전파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하자.” 이 언급을 통해 볼 때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은 보수주의 신학이었는데, 1930년대 새로운 신학적 변화가 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한국 초기 선교사들의 사상이 웨스트민스터 표준서에 기초한 것임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저들의 열망은 일반적으로 보수주의,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장로교 신학을 전하러 왔다고 강조했다.

한국교회 초기의 신학을 헤아려 볼 수 있는 다른 단서는 1907년 독노회 조직 때 채택된 교리 표준이다. 독노회는 ‘12개 신조’를 채택했는데, 이 신조는 영국의 장로교회가 작성한 것으로 1904년 인도장로교회가 채택했던 것과 동일한 신조였다. 단지 서문만 수정한 것이었다. 이 신조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유일신 하나님과 그 성품,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사역, 인간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성령의 역사, 선택과 수양, 성례, 신자의 의무, 최후 심판 등 12가지 기본교리가 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 12개 신조에는 칼뱅주의에서 중시 되지만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던 이중예정에 관한 고백이 없다. 또한 근본주의와 구별되는 문화에 대한 소명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칼뱅주의적이라기 보다는 보수주의적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은 개혁주의적인 특징이 있으나 보수주의 신학, 혹은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적 신학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고신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