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은 윤심덕과 함께 왜 현해탄에 몸을 던졌나
입력 2012-01-06 18:04
‘근대서지’ 4호, 부친 김성규의 편지 형식 훈계서 발굴 공개
“동양의 현인(賢人)이 말하기를 얼굴의 침은 기다리면 마를 것이며 손으로 씻을 필요는 없듯이 두려움과 성냄 역시 그와 같다.”
1926년 가수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한 우리 근대연극의 개척자 김우진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훈계서 일부다. 근대서지학회가 발간하는 반년간 잡지 ‘근대서지’ 4호는 김우진에게 보낸 부친 김성규의 계서(戒書)를 발굴 공개했다. 계서는 김우진이 18세 때 동생 철진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 규슈(九州)에 있는 구마모토농업학교에 다니던 1915년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으로, 두툼한 한지를 엮어 만든 일종의 서책이다.
김우진의 생애에서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무엇보다 아버지였다. 김성규는 전남 장성군수를 지낸 목포 갑부였다.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가학을 이어받은 김성규는 15세 때 벼슬길에 올라 광무국(鑛務局) 주사를 시작으로 나중엔 지금의 홍콩 총영사에 해당하는 외교관까지 지낸 개화파 지식인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무사히 유학을 마치고 귀국, 가업을 이어받기를 원했다.
“형의 허락을 받기 전 아우는 시내에 한 발자국도 내딛지 말 것이며 또 형의 가르침이 없으면 그 아우는 단돈 한 푼도 사용하지 못한다.” “종이 하나라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희에게 누차 가르친 바 있으니 사소한 물건이라도 항상 절약하고 근검해야 한다.” “필요 없는 친구를 만나는 것은 끊는 것이 좋다.” “일정한 처소 이외의 곳에서는 눕지 말 것.” “처를 구하는 것은 물론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 것.”
계서엔 이처럼 무엇이든 금지해야 하는 덕목이 나열되고 있다. 계서를 발굴 공개한 서지학자는 신연수씨다. 신씨는 “몸이 강건하고 성격이 명랑한 철진은 몰라도, 허약하고 내성적이며 사색적인 우진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로 압박이 됐을 것”이라며 “문학에의 열망을 끝내 저버릴 수 없었던 우진은 가출해 다시 일본으로 도피하기도 하지만 엄격한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 후일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게 아닌가 여겨진다”고 말했다.
김우진은 나이 서른에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지만 8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후학들에게 많은 숙제를 던지고 있다. 그것은 많지 않은 작품만큼 짧았던 그의 인생에 아직도 풀리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인데, 이번 계서가 공개됨으로써 아버지 억압을 견디기 힘들었던 한 문학적 자유주의자의 반항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한다.
한편 ‘근대서지’ 4호는 민족시인 신동엽의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가 당초 알려진 것보다 3년 정도 앞선 1964년 12월 시 동인지 ‘시단’ 6집에 처음 발표됐다는 내용도 소개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