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백석을 찾아서] ① 유년 시절… 산비탈 외딴집
입력 2012-01-06 18:44
분단시대 극복의 정점에 서 있는 천재시인
올해로 천재시인 백석(白石·1912∼1996)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평안북도 정주 태생인 백석은 우리의 잃어버린 영토에 깔린 북방정서를 평북 방언의 질감을 통해 보석처럼 갈고닦음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미학적 깊이를 더해 주었다. 하지만 재북(在北)시인인 탓에 우리 문학사의 전면에 등장하지 못하다가 1988년 납·월북 문인 해금 조치 이후에야 조명받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백석은 분단시대 문학사가 여전히 놓치고 있는 공백에 해당한다. 현재의 문학사가 남북한 모두의 불구적 성격에 구속돼 있다고 할 때 백석은 그 불구성을 극복하는 데 가장 필요하고 적합한 존재이다. 그는 남과 북이라는 체제적 성격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가장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이었다. 남북 언어의 통일과 조탁(彫琢)을 꾀하는 길라잡이로서 백석의 현재성은 두드러진다.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 그의 일대기를 신년기획 시리즈로 추적한다.
백석의 고향인 평북 정주는 지금 갈 수 없는 땅이다. 예전엔 경성에서 경의선을 타고 갔다. 평양을 지나 운전(雲田), 고읍(古邑) 다음이 정주(定州)역이다. 해방 이전, 정주역전엔 운해유기점이란 물상객주가 있었다고 한다. 납청장에서 만들어진 반짝반짝 윤이 나는 유기들은 정주를 거쳐 가게 마련이었고 곽산, 노하, 선천, 동림 등지에서 놋그릇을 사러 온 사람들로 붐비던 정주였다. 정주는 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의 영향으로 기독교 세력이 강했다.
백석 본적지는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그곳에 가려면 정주가 아니라 경성에서 33번째 역인 고읍에서 하차해야 가깝다. 고읍에 내리면 논밭을 가로질러 오산학교가 보이고 익성동 마을이 눈앞에 들어온다. 백석은 1912년 7월 1일 익성동 1013호에서 태어났다. 주위엔 천마산맥의 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해발 545m의 독장산, 동쪽으로는 예부터 봉황새가 날아와 울었다는 봉명산, 멀리서 보면 산 모양이 고양이 머리처럼 보인다는 묘두산(猫頭山), 서쪽으로는 임해산이 있어 이웃 곽산(郭山)과 경계를 이루는 고장이다.
서쪽으로 장수탄강이, 동쪽으로 달천(撻川)이 흘렀다. 달천은 구성(龜城)의 인산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흘러 봉명산 물줄기와 합류해 방호고개 밑에서 꺾어 흐르다가 이윽고 정주 앞바다로 들어간다. 선산인 황성산 밑에 백석이 첫 울음을 터뜨린 생가가 있다. 산짐승이 자주 출몰하는 전형적인 산골 마을로 특히 여우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부친의 이름은 시박(時璞), 자는 용삼(龍三)으로 수원 백씨 정주파 시조인 백역(白繹)의 17대손이었다. 평소엔 백용삼으로 불렸으나 후일 백영옥(白榮鈺)으로 개명한다. 백용삼은 젊은 시절에 사진기술을 익힌 개화기 사진계의 초창기 인물로, 조선일보 사진반장을 역임했다고 알려져 있다. 모친 이봉우(李鳳宇)는 서울에서 정주로 시집을 와서 하숙을 쳤다. 유난히 늙어 보이는 백석의 아버지에 비해 어머니는 젊고 예쁘고 활동적이었다. 음식 솜씨가 정갈해 고당 조만식 선생은 정주의 오산학교 교장 시절 언제나 그 하숙집에 기거했다. 고당과 백용삼은 친분이 두터웠으며 조선일보사 사주 방응모와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고 한다.
백석은 부친이 37세 때, 모친이 24세 때 낳은 귀한 첫 아들이었다. 백석 본명은 백기행(夔行). 기연(基衍)으로도 불렸다. 필명은 백석(白石, 白奭)인데 주로 백석(白石)으로 활동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장수를 빌려고 강, 바위, 나무 따위에 치성을 드렸다. 유년 시절의 백석은 ‘호박떼기’(말타기와 비슷한 놀이), ‘제비손이구손이’(다리를 서로 끼워 넣어서 노는 놀이)를 하며 자랐다. 유년의 백석이 누구와 어울렸고 어떤 풍광 속에서 자랐는지는 첫 시집이자 유일한 시집 ‘사슴’(1936년)에 수록된 ‘여우난곬족’을 통해 어느 정도 드러난다.
“명절날 나는 엄매아배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 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李녀 작은 李녀//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 고무의 딸 承녀 아들 承동이”(‘여우난곬족’ 일부)
‘여우난곬족’에는 수원 백씨 집성촌인 익성동의 일가들이 마치 족보를 들여다보듯 상세하게 나열돼 있다. 백석에게는 한 명의 큰아버지와 두 명의 작은아버지, 그리고 네 명의 고모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고모들의 식솔은 질펀했다. 산 너머 해안가 덕언면 중봉동에 사는 홍정표에게 시집간 큰고모는 남편이 서른한 살에 요절해 과부로 살았다. 이씨 집안으로 시집간 둘째 고모는 얼굴이 곰보에다 말조차 더듬었다. 영변 근처 토산에 사는 승두현에게 시집간 셋째 고모, 그리고 김훈호에게 시집간 막내 고모의 식솔들을 하나하나 거명하며 백석은 그들이야말로 여우가 나오는 골짜기에 사는 족속이라고 유년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큰집이 있는 곳이 바로 여우난골이고 명절날 그곳에 모인 친척이 여우난곬족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가 경성과 같은 타관에 가서 몇 날이고 몇 달이고 돌아오지 않는 밤이면 예닐곱 살 백석은 여우난골이라는 깊은 산골의 짐승 소리와 바람 소리에 놀라 어머니가 깔아놓은 이불속으로 자지러들곤 했다. 어머니를 대신해 먹을 것도 챙겨주고 옛 이야기도 들려주던 막내 고모가 시집 간 것도 이때쯤이었으니 어린 백석은 밤이 무서웠고 또한 고적했다.
“아배는 타관 가서 오지 않고 산비탈 외따른 집에 엄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 집뒤로는 어늬 산골짜기에서 소를 잡아먹는 노나리꾼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거리며 다닌다. (중략) 또 이러한 밤 같은 때 시집갈 처녀 막내고무가 고개너머 큰집으로 치장감을 가지고 와서 엄매와 둘이 소기름에 쌍심지의 불을 밝히고 밤이 들도록 바느질을 하는 밤”(‘고야(古夜)’ 일부)
그렇다고 백석의 아버지가 타관으로만 떠돈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은 채 오리 잡는 덫을 놓으러 개울이며 논으로 갔고, 장날에는 아버지를 쫓아 장터에 가던 소년 백석이었다. “오리치를 놓으러 아배는 논으로 내려간 지 오래다/ 오리는 동비탈에 그림자를 떨어뜨리며 날아가고 나는 동말랭이에서 강아지처럼 아배를 부르며 울다가/ 시악이 나서는 등 뒤 개울물에 아배의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오리를 모두 던져 버린다// 장날 아침에 앞 행길로 엄지 따라 지나가는 망아지를 내라고 나는 조르면/ 아배는 행길을 향해서 커다란 소리로/ -매지야 오너라/ -매지야 오너라”(‘오리 망아지 토끼’ 일부)
오리 덫을 놓으러 논으로 내려간 사이에 오리가 논둑 비탈에서 날아가 버린 것을 목격한 소년은 오리를 놓친 것이 아버지 탓이라는 듯 공연히 심술이 나 있다. 장날에 장꾼들의 행렬이 지나갈 때 어미 말을 따라가는 망아지가 보이자 아버지에게 망아지를 사달라고 떼를 쓴다. 그런 어린 아들을 달래려고 아버지는 “매지(망아지의 평북 사투리)야 오너라”라고 큰 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도가 소박한 부자유친의 영상으로 바싹 당겨져 오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여우난곬족의 일원으로 유년을 보낸 백석이 인근 오산소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체험한 농촌공동체의 유산은 시집 ‘사슴’에 수록된 ‘모닥불’에서 절정을 이룬다.
백석이 어떤 생각으로 ‘모닥불’을 쓰게 됐는지는 알 수 없으되 이 시의 착상은 매우 놀랍다.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불을 지피는 재료가 되고 그 불 주위에 이질적인 사람들이 평등하게 둘러 앉아 몸을 녹이는 장면은 이전의 어떤 시에서도 보지 못했던 대동화합과 평등공존의 사상을 드러낸다. 버림받은 모든 것을 차별 없이 섞어서 화합의 불길을 이루는 모닥불, 거지도 쬐기만 하면 살이 찐다는 바로 그 모닥불을 뒤로 하고 여우난곬족 백석의 유년 시절은 끝나가고 있었다.
백석 누구인가
본명 백기행(白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29년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그 모(母)와 아들’이당선돼 문단에 데뷔했다.
그해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영문과에 유학했다.
34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잡지 ‘여성’ 편집을 맡았으며 시 ‘정주성’ 등을 발표했다.
36년 시집 ‘사슴’을 100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면서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재직하다 만주로 건너가 방랑생활을 했다.
해방 직후 고당 조만식 선생의 러시아어 통역으로 평양에서 활동하다 고향 정주로 돌아갔다.
58년 숙청돼 함경북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치기로 일했다.
이후 삼수군 문화회관에서 문학 창작지도를 하다가 96년 사망했다.
도움말 주신 분(가나다 순)
김재용(납북월북작가 전문가·원광대 교수)
이동순(시인·영남대 교수)
이숭원(한국시학회 회장·서울여대 교수)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