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아내의 한맺힌 삶… ‘하해여관’
입력 2012-01-05 17:48
하해여관 / 김성희 / 사회평론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시집 온 오묘연 할머니(92·대구 황금동). 18세 꽃다운 나이에 신랑 얼굴도 못 본 채 혼례식을 올렸던 할머니는 결혼하고 나서야 남편 이병기 선생(1906∼1950)이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자손임을 알게 된다. 시아버지 백농 이동하 선생(1875∼1959)은 만주신흥무관학교 전신인 신흥강습소 설립자, 시조부 이규락 선생(1850∼1929)은 1905년 항일 언론투쟁단체인 충의사 회원으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신접살림을 차린 곳은 대구의 하해여관. 간판만 여관일 뿐, 사실상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장소였다.
전기 작가 김성희(43)의 첫 장편 소설 ‘하해여관’(사회평론)은 오 할머니와 아들 이효철씨의 증언을 토대로 탄생한 작품이다. 소설의 걸개상 주인공은 ‘이씨 3대’일 수 있지만 그 내용은 오 할머니의 눈물 어린 시선에 맞춰져 있다. 남편은 일제의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50년 7월 경산코발트광산에서 국군에 학살당했다. 남편은 독립유공자 명단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하고 있다.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게 이유이다. 소설은 그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아들이 공터 안쪽에 있는 갱의 입구를 가리켰다. 오묘연의 시선이 좁고 까만 입을 벌리고 있는 수평갱 입구에 꽂혔다. 옆으로 젖혀진 철문에는 노란 리본과 꽃다발들, 현수막이 매달려 있고, 굴에서 흘러나온 물은 바깥 바닥까지 흥건히 적셔놓고 있었다. 어두운 굴속을 바라보는 오묘연의 눈빛이 순간 아득해졌다.”(11쪽)
다음 장면은 오 할머니의 회상으로 이어진다. 1937년 퇴계 후손인 안동 명가로 시집가 신접살림을 차린 곳이 하해여관 19호실이었다. 할머니는 결혼한 지 1년여 만에 남편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남편은 경북 왜관에서 야학당을 개설, 일제 만행을 성토하다 1939년 적발돼 1년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오묘연은 포대기를 싼 아들을 안고 면회실로 들어갔다. 창살이 없이 개방된 면회실이었다. 이병기는 설렘과 기대에 들뜬 채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건지, 정확한 세월을 계산하기도 힘들었다.”(174쪽)
일제의 고문으로 치근(齒根)이 모조리 빠져버린 남편은 갓 돌 지난 큰아들을 안고 눈물을 흘렸다. 게다가 1951년, 시아버지가 ‘이승만 대통령 하야문’을 발표하면서 집안은 또 한 번 소용돌이친다. 시아버지를 정적으로 지목한 자유당 정권의 냉대와 감시가 이어지면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급기야 시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오 할머니는 홀로 모진 세파에 맞서야 했다. 오 할머니는 지금도 대구의 좁은 다세대 주택에 혼자 거주하고 있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