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2) 나사로의 집, 마가의 집

입력 2012-01-05 18:09


예수님은 왜 나사로의 집에 못가고 마가의 집을 택했나

하나님과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신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네 권의 복음서가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복음서들을 읽기 시작하면 곧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만나게 된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나사로의 사건이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죽은 지 나흘 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살리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기록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그분을 죽음으로 몰고 갔을 만큼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요 11:53)

즉 예수께서 다시 살려낸 나사로가 버젓이 살아 있으므로 예수를 죽이려 했고, 살아난 나사로도 함께 죽이려 했던 것이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요 12:10-11)

이렇게 중요한 사건이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에 빠져 있고, 마가복음을 기초로 하여 기록되었다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면 먼저 기록된 복음서들에 누락되었을 수도 있고, 나중에 요한이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써 넣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사로의 사건은 그런 사소한 사건이 아니므로 읽는 사람을 당황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이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리아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요 11:1)

앞의 세 복음서 중 누가복음에는 이들 자매의 이야기가 잠깐 나온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눅 10:38-39)

나사로는 이들 자매의 오라비였다.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자는 그의 오라버니더라.”(요 11:2)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를 많이 따랐고 잘 섬겼으며 그분은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감람산 넘어 베다니에 있는 그들의 집을 방문하셨을 것이다. 또 그들 자매는 물론이고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를 많이 사랑하셨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요 11:3)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을 비롯한 각종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에 가셨는데 그 일대에는 아는 사람이 없는 고로 달리 거처할 곳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들이 그들을 영접하므로 나사로의 집에서 식사도 하고 머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이 오자 예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요 11:4)

그리고 당장 베다니로 가시지 않았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요 11:5-6)

그 전의 수전절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솔로몬 행각에서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예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시며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고 하자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빠져나와 요단강 건너편 지역에 머물고 계셨던 것이다(요 10:40). 그분은 이틀 후에 비로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유대로 다시 가자.”(요 11:7)

그러자 제자들이 뜻밖의 반응을 나타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요 11:8)

제자들이 감히 그분의 말에 따르지 않겠다는 의사를 집단적으로 표시한 것이다. 그분과 제자들 사이에 뭔가 미묘한 간격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갑자기 ‘실족’에 관한 말씀을 하신다.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요 11:10)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

예수께서 잠들었다는 말씀은 곧 죽었다는 뜻이었다. 그분은 늘 죽었다는 것을 잠들었다고 말씀했으며(막 5:39), 제자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제자들은 거의 야유 섞인 반응을 나타냈다.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요 11:13)

도대체 왜 제자들은 그들이 예루살렘에 갈 때마다 신세를 졌던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오라비 나사로에 대하여 그렇게 반응했던 것일까? 혹시 예수께서 나사로를 많이 사랑하셨던 것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닐까?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베다니 사람 나사로와 가까워지자 그분이 영광을 받아 왕위에 오르실 때 나사로에게 높은 자리를 빼앗길 것 같아서 경계심이 생겼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시 직설적으로 말씀하셨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요 11:14)

그리고 꼭 가야 하는 이유도 말씀하셨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요 11:15)

그때 도마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6)

제자들과의 논쟁 장면은 거기서 끝난다. 그리고 예수께서 베다니에 나타나 마르다와 마리아를 만나시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죽은 나사로를 불러내시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과연 예수의 제자들은 선생님과 함께 베다니에 갔던 것일까? 갔는지 가지 않았는지는 모르나 베다니 장면에는 유대인들만 있고 제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요한은 이 장면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아마도 혼자 가만히 올라가 그 사건을 목격했을 수도 있다. 그 후로는 다시 예수와 제자들이 갈릴리 지역에 나타난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때 예수께서는 ‘실족’에 관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그때 성미 급한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마 18:21)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

그렇게 해서 예수와 그 제자들의 동행이 계속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마지막 예루살렘 행을 결행하시는 것이다. 예수의 일행은 베다니에 도착했으나 환영의 식사를 나사로의 집에서 하지 않았고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가졌고(마 26:6),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자기 집이 아닌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그분께 나드 향유를 부었다. 그리고 유월절 전에 예수와 나사로에게 닥친 위기를 감지하고 그분께 망명을 권하러 온 헬라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그날 이후로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은 성경에서 사라진다. 전승에 의하면 헬라인들은 예수의 부탁을 받고 나사로와 그 누이들을 갈리아의 루그두눔 지역으로 피신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예수와 그 제자들의 유월절 만찬은 베다니 나사로의 집이 아닌 예루살렘 성안 마가의 집 다락방에서 개최되었던 것이다.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