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임미정] 북촌에서의 하룻밤

입력 2012-01-04 18:29


새해 하루 전, 한옥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북촌길에는 일본 관광객이 많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20여평 조그만 전통 공간이 특별한 세상으로의 여행으로 이끌었다. 집 주인의 성향 때문인지 조심스럽게 고친 내부는 현대적 동선을 고려해 편리하게 디자인되었고, 조그만 부엌엔 커피세트까지 갖춰져, 맛있는 커피까지 내려 마실 수 있었다.

지인과 나는 이 구석 저 구석 살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연말의 분주함 속에서 모처럼 하루 쉬겠다고 묵게 된 터라, 대화는 마음 가는 대로 편하게 흘렀다. 처음엔 전통가옥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웃풍이 주는 공기의 신선함과 처마 마루의 고즈넉함, 그러다가 북촌의 한옥 가격이 10년 전에 비해 몇 배가 올라 이제 이런 멋진 한옥에서의 거주는 꿈도 꿀 수 없음을 한탄하며 뜨거운 아랫목에서 은행통장 타령까지 하게 되었다.

직업이 예술인지라, 필자의 현실은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비현실 안에 있다. 1초에 몇 개씩 치는 음표들, 데시벨로 보면 별 차이 없는 강약인데도 잘 표현하기 위해 몇 년씩 골머리를 앓는다. 멋지게 혹은 잘못 연주 되었을 때 청중의 반응은 엄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현실인 이런 것들이 사회의 다른 상황에서는 비현실적 주제들이다.

지난 한 해 지구촌 곳곳에서 전해오는 대형 사건들을 접했고, 올해는 또 다른 어떤 일이 우리의 심리적 공간과 생존 방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지 모를 일이다. 나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큰 사건, 중요한 정책 논의를 들을 때마다, 피아노 앞에서 소리에너지의 결정체에 집중하고 있는 자신이 이 생동하는 사회에서 유리된 비현실적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굳이 현실과 비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런 것들은 항상 같이 공존해야만 하는 두 개의 세계이리라. 철길 위에 있는 아이를 위해 몸을 던진 대학생, 불구덩이에 뛰어들어 생명을 구한 소방관, 평생 모은 돈을 조용히 기부하는 사람들, 그리고 끝없는 훈련으로 전율할 만한 음악을 들려주는 사람들. 어쩌면 이런 비현실적인 인간들은 우리가 매일매일의 현실을 어떻게 디자인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존재들이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자 하는 존재들, 이러한 비현실적 존재들이 없다면 무엇을 위해 우리의 현실을 만들어간단 말인가.

한옥에서 내려오며 잠시 우울했었다. 우습게도 지인과의 대화는 현실적인 은행잔고 이야기로 끝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북촌의 하룻밤은 의미가 컸다. 정신을 내면으로 향하게 만드는 조용한 마당, 나무가 숨쉬느라 벌어진 마루, 머리는 차갑고 엉덩이가 따뜻해 더 좋았던 아랫목의 정겨움. 이런 경험은 올해 내내 기억하고 싶은 내 마음속의 현실이 되었다.

임미정 한세대 교수 피아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