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강석] 후기산업사회의 한국 정치

입력 2012-01-04 18:29


정치학자들은 산업사회와 후기산업사회를 구별해 정치현상을 논의한다. 이들은 경제활동인구 중 50% 이상이 서비스업에 종사하면 산업사회에서 후기산업사회로 진입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은 1995년 후기산업사회로 진입했지만 2011년에 와서야 후기산업사회의 정치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는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냉전 상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산업사회에서는 물질적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서 정부와 정당, 이익집단들이 서로 부딪혀 가며 노력해 왔다. 산업사회에서는 정당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준거 틀이 바로 ‘진보’ 또는 ‘보수’와 같은 정치이념이다. 산업사회의 정치 이슈는 경제성장, 1인당 국민소득, 기업투자, 수출입, 경상수지 등이다.

무당파 유권자가 정당 심판해

물질적 결핍을 극복하고 풍요를 향유하는 후기산업사회에서는 진보나 보수와 같은 이념적 호소력이 약해지면서 ‘상식’으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긴다. 후기산업사회의 정치 이슈로는 사회복지, 환경오염, 인구과밀, 교통문제, 물가, 교육, 보육, 청년실업 등을 들 수 있다.

산업사회의 정당들은 후기산업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며 새로운 패러다임에 적응할 수 있는 유연성도 결핍돼 있다. 산업사회에 기반을 둔 정당, 이익집단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한 유권자들은 시민운동 등으로 이익을 표출할 수밖에 없게 된다. 또 유권자들은 기성 정당을 버리고 무당파로 투표에 임한다.

한국 정치는 어떠한가. 올해 총선과 대선을 치르면서 기성 정당들은 대대적 재정렬(realignment)이나 와해(decomposition) 국면을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10·26 서울시장선거에서 보듯, 후기산업사회의 무당파 유권자들이 이를 재촉할 것이다. 4월 총선에서는 서울을 시작으로 대도시에서 무소속 돌풍이 불어 정당들이 과반수를 못 채우는 경우, 기존 여당은 ‘침몰하는 항공모함’, 야당은 ‘공중에 던져진 샐러드’라는 현실을 맞을 지도 모른다.

이명박 정부는 ‘747 경제목표’를 꾸준히 추진했고, 4대강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으며,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하는 등 분명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후기산업사회 가치관으로 앞날을 바라보며 새로운 지도자를 찾고 있다. 지금까지 언론에 크게 부각된 후보로는 안철수 교수, 박원순 시장, 박근혜 의원이다. 이 세 사람의 개인적 배경, 정치적 행적이나 철학을 세밀히 들여다보면 진보나 보수로 분류하기에는 후기산업적 가치관을 많이 포용하고 있다.

소통하는 지도자 필요한 때

올해는 한국이 산업사회에서 후기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정치적 전환점이 될 것이다. 많은 유권자들은 안철수 교수의 행태에 주목한다. 후기산업사회 가치관으로 볼 때 이는 결코 순간적인 안철수 현상이나 거품이 아니다. 그는 묵묵히 한국을 이끌어 갈 구상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 안 교수는 후기산업사회에 걸맞은 지도자로 보인다. 그는 산업사회의 기성 정당과는 연대하지 않을 것이며 신당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그 당이 그 당’이라는 유권자들의 판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신당에 참가하는 일도 없을 것 같다.

박근혜 의원의 경우 복지국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후기산업적 가치관을 대폭 수용하고 있다. 다만 ‘침몰해 가는 항공모함’에서 과감히 뛰어내리지 못해서 현상유지 세력으로 간주되는 것 같아 안타깝게 생각한다.

또 이들은 서로를 헐뜯느라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정치인들이 아니다. 토크 콘서트나 질의응답과 같이 부드러운 대화를 나누는 새 시대의 지도자들이 확실하다.

이강석 국방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