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서완석] 잊혀질 권리도 있다
입력 2012-01-04 18:36
“모든 것이 기록될 때 많은 부작용이… 디지털 환경에서도 소멸시효 만들어야”
2006년 2월 뇌과학 분야의 유력 학술지 중 하나인 ‘뉴로케이스’에 흥미로운 논문 한 편이 실렸다. 자신이 살아온 과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한 여인의 사례를 다룬 ‘비상한 자서전적 기억의 사례’라는 논문이었다. 논문 속 AJ라는 여인은 과거 어떤 날짜를 제시하든 그날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기억했다. 반대로 어떤 사건을 말하면 즉각 그 사건이 벌어진 날짜와 요일도 대답할 수 있었다. 해마다 날짜가 바뀌는 부활절도 모두 맞혔다. 연구팀은 그녀의 비상한 기억력을 설명하기 위해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ia)’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축복처럼 보일 수 있는 이 엄청난 기억력은 그녀에게 커다란 고통을 가져다 줬다고 한다. 인간의 뇌는 선택적인 기억을 통해 부정적인 기억을 지우고 긍정적인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녀는 상처가 되는 말들, 남편을 잃은 아픔 등 온갖 나쁜 기억들이 생생하게 살아 스스로를 괴롭혔다. 일반인이면 벌써 잊었을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그녀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부정적인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자전적 소설로 꾸며져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The woman who can’t forget)’란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인간은 원래 망각의 동물이다. 그래서 언어, 문자, 그림 등을 이용해 기억을 이어왔고 사진, 음반 등 갖가지 보조기억장치를 개발해 기억을 확장해왔다. 기억의 확장사는 바로 문명사이기도 했다. 더욱이 최근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지금은 ‘과잉기억시대’라 불릴 만큼 무엇이든 기억되고, 기록되는 시대가 됐다. 망각이 예외가 되고 오히려 기억이 일반화되는 세상이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보급에 따라 과잉기억시대가 더욱 광기를 띤다.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를 통해 내뱉은 생각들은 모든 것이 공개된 뒤 저장된다. 좋은 정보든, 나쁜 기록이든 무제한으로 퍼나르고 서버 어딘가에 저장된다. 그리고 구글 등 검색업체들은 서버에서 어떤 정보든 쉽게 찾아내 들춰내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처럼 SNS는 그 내용이 온전히 기록되면서 새로운 문제점을 야기한다. 수많은 네티즌들은 과거 자신이 올린 글이나 사진으로 인해 현재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호소한다. 최근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으로 뽑힌 이준석(27) 위원의 경우 그가 트위터를 통해 발설한 1년치 생각이 고스란히 까발려져 사상 검증에 동원됐다.
SNS의 내용들이 훗날 폭로될 것을 의식할 경우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만 말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마치 교사에게 일기장을 검사받는 초등학생이 자신에게 불리한 하루를 감추고 칭찬 받을 착한 일만 기록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진실한 소통의 수단인 SNS는 소통을 방해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바로 디지털 기록의 저장성 탓이다.
‘지워지지 않는 기록들’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 디지털 환경에서 ‘잊혀질 권리’는 없을까. 인터넷 관리체제와 규제를 연구하는 옥스퍼드대 빅토어 마이어 쇤베르거 교수는 ‘잊혀질 권리(원제 Delete)’라는 저서를 통해 이 문제에 접근했다. 그는 ‘완벽한 기억’이 총체적 감시사회로 이끌고 그 결과 개인 자유의 기반인 프라이버시가 침해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적절한 ‘망각’이야말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은 건전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과 함께 제2의 기회까지 열어준다고 말한다. ‘세월이 약’이란 말처럼 망각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용서의 기회도 준다는 말일 게다.
쇤베르거 교수는 지워지지 않은 기억들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망각 기법을 도입할 것을 권고한다. 디지털 정보를 처음 저장하는 사람이 그 정보의 소멸시효를 미리 설정하는 것이다. 또 사후에 데이터 삭제를 요구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유럽에서는 지난해 자신의 데이터 삭제를 기업에 요구할 수 있는 소위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의 법제화 움직임이 사회적인 주목을 끌었다.
서완석 체육부 국장기자 wssu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