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의 바둑이야기] 19년 만에 찾아온 우승

입력 2012-01-04 18:40


초특급 기사들의 명승부로 화려했던 2011년이 지나갔다. 1인 독제체제가 아닌 춘추전국시대로 새로운 스타들이 속속 등장한 한 해였다. 수많았던 명승부 가운데 유난히 마음속에 남는 승부가 있다. 연말의 분주함 속에 묻혀 버린듯해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것은 정말 사건이었다.

작년 12월 27일에 제2회 대주(大舟)배 결승전이 펼쳐졌다. 대주배는 만 50세 이상(1960년 이전 출생자)의 기사들만 출전하는 시니어 기전으로 초대 우승은 조훈현 9단이 차지했다. 당시 결승전은 조·서의 대결로 70·80년대를 풍미했던 라이벌전이었지만 조훈현 9단이 서봉수 9단을 상대로 2:0 완봉승을 거뒀다.

그리고 맞이한 2회 결승진출자는 조훈현 9단과 서능욱 9단이었다. 조훈현 9단은 전기 우승자답게 손쉽게 올라왔지만, 서능욱 9단은 준결승전에서 서봉수 9단을 만났다. 상대전적 25승 47패. 조·서 시대의 희생자인 서능욱 9단에게는 너무나도 큰 벽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기회가 온다.

서능욱 9단은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큰 벽을 성큼 넘어서며 드디어 결승무대를 밟았다. 19년만의 일이다. 그는 1972년 프로에 입문한 총망 받는 기사였지만 90년대 후반까지 13번 결승에 진출해 한 번도 우승컵을 안지 못했다. 1번은 이창호 9단에게 패했고, 나머지 12번은 모두 조훈현 9단에게 무너졌다. 가장 친한 선배이기도 하지만 가장 원망스러운 상대이기도 하다. 결승전에 앞두고 그는 “여전히 어려운 분이죠. 그러나 쉽게 물러서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40년 동안 극복하지 못한 산인데 한 번은 넘어서야죠”고 임전 소감을 밝혔다.

‘한 번은’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와서 박힌다. 대국에 앞선 비장함 보다는 간절함이 묻어나는 단어다. 그 속에는 활활 타오르는 의지보다는 영화 같은 기적을 바라는 마음도 있다. 그렇게 승부사들에게는 그 ‘한 번’의 기회가 오지 않아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승 시작.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역시 조훈현은 강했다. 내용은 쉽게 풀리지 않고 종반에 접어든 상황. 초읽기가 시작되자 조훈현이 흔들렸다. 아주 미세한 빈틈. 서능욱은 전광석화와 같은 수읽기로 조훈현의 대마를 몰살시켰다. 승부는 175수 불계승. 어떤 사람들은 초읽기의 해프닝 이라고도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서 9단은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컴퓨터 앞으로 가서 인터넷 바둑을 둔다. 하루에 최소 10판 이상은 둔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된 아이디 이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때론 강단을 당해도 어느 순간엔가 다시 올라와 있다. 수 만 수 천 판의 인터넷 바둑으로 단련된 초읽기. 이것이 서능욱 9단이 19년을 기다려온 비장의 무기였다. 2012년 새 해에도 이런 영화 같은 승부가 더욱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

<프로 2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