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권태일 (3) 껌팔이·짜장면 배달에도 ‘위인의 꿈’은…
입력 2012-01-03 18:08
우리는 매일 저녁 명순이네에 갔다. 명순이 엄마로부터 동화와 위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링컨, 강감찬, 을지문덕, 유관순, 나이팅게일 등 위인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줄 때마다 우리는 주먹을 쥐기도 하고, 머리가 쭈뼛쭈뼛 서기도 하고, 땀을 흘리기도 했다.
당시는 흑백TV도 동네에 한두 대밖에 없었다. 라디오도 없어 여러 친구가 귀를 들이대고 들었다. 그럴 때 동화와 위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엄청난 고액과외였다. 지금의 홈스쿨링을 이미 45년 전 나는 참으로 효과적으로 배우게 된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명순이 엄마는 부부 교사였다. 한데 남편이 위암으로 사망한 이후에 시어머니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았다. 며느리 때문에 아들이 병들어 죽었다는 것이다. 핍박을 견디다 못해 결국 외딸을 데리고 집을 나와 떠돌다가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했고, 애국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고생을 해야 했다. 대체로 위인들은 어린 시절 신문팔이나 껌팔이 등을 하며 수많은 고생을 하다가 결국 성공했다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나는 그 위인들처럼 되고 싶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중학교 때 충북 제천에 있는 한 고아원까지 찾아가 아이들을 보고 돌아왔다. 당시 시골에만 있던 내가 제천까지 간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후 방학 때 서울에 가서 껌팔이를 했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 방학 때는 서울에 올라가 짜장면 배달을 했다. 이 또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 코스를 밟아가는 과정으로 여겼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곳이 있다. 서울 남가좌동에 있는 가좌반점이라는 곳이다. 거기에서 참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배달통을 들고 가다가 엎어져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음식 그릇을 대충 거둬 식당으로 돌아갔다가 주방장에게 국자로 머리를 수없이 얻어맞았다. 그때도 나는 참았다. 이유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이 나의 머릿속에는 오직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교육이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이후 45년이 지난 지금의 모습, 그리고 지금의 내 가치관을 보면 환경과 시간만 달랐지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중학교 때는 국회의원이 되고 싶었다. 당시 국회의원에 나서는 사람들은 마을회관을 지어주고, 다리를 놓아주었다. 정말 좋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그리고 머리가 좀 큰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좀 현실적으로 육군사관학교를 들어가고 싶었다. 당시는 육사 출신이 거의 고위직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나의 가치관은 조금씩 현실화로 이어져 갔다.
특히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옷을 입고 다닐 때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구겨짐 없이 입고 다니려고 애를 썼다. 바지가 구겨지는 것이 싫어 의자가 있어도 앉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중·고교 때는 뒷자리에 소위 ‘노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도 했다. 홍길동과 같은 의로운 건달이 되고 싶었고 그 친구들은 별 상스런 욕을 다 했지만 나는 농담으로도 욕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이런 기억을 돌이켜보면 나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다.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나 자신에 대하여 완벽하려고 그렇게 애를 쓴 것은 절대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강권적인 하나님의 이끄심이었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