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권태일 (2) 별들이 가르쳐준 진리 ‘더불어 빛날 때 더 아름답다’

입력 2012-01-02 18:18


나는 1955년 경북 성주군 초전면 봉정동 654번지에서 아들 셋, 딸 셋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수로 일하시다가 침구학원을 다녀 침을 놓으셨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읍내 중학교 뒤 조그마한 집에서 진료를 했는데 환자들이 50m 정도나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용하다고 소문났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간호사가 되어 환자들을 돌봐주었다. 나는 죽어도 뜸을 뜨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을 붙잡아놓고 시범을 보이는 조교가 됐다. 막내였던 나는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어릴 때의 기억은 그리 많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술을 너무나 많이 좋아하셨던 탓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누님 두 분이 이미 결혼하였고 남은 4남매를 어머니 혼자 기르시느라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어깨너머로 침술을 전수받아 농한기에는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며 몸이 아픈 사람들에게 침을 놓아주었다. 참으로 용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많은 이들이 찾아오기도 하였다. 대체적으로 아이들이 놀다가 팔이 빠지거나 입이 돌아가신 분들은 100% 치료해주는 명의로 소문이 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우리 동네는 50가구 정도가 집성촌으로 모여 살았다. 동네 사람들은 어느 집 숟가락과 밥그릇이 몇 개인지를 알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명순이라는 아이와 엄마가 이사를 왔다. 어머니의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중에 ‘이보게, 명순이네는 쌀이 없어 물만 먹고 불을 때서 밥 해먹는 척한다며?’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나는 평소 친구들과 윷놀이를 하기 위해서 자주 모이곤 했었는데, 그날 저녁에 다 같이 모여서 친구들에게 제안을 했다. “야 친구들아, 명순이네가 양식이 없어 굶는다는데 우리 쌀 한 띠빙(뚜껑)씩만 가져와 모아서 전달해주자”고 제안했다. 친구들은 흔쾌히 동참하겠다고 하여 그 이튿날 저녁에 쌀을 가지고 왔다. 어떤 애는 봉지에 넣어오기도 하고, 어떤 애는 부모님께 얘기하지도 않고 호주머니에 넣어와 한 움큼씩 꺼내 놓기도 하였다.

모두 모으니 서너 되가 되었다. 뭐라고 위로의 글을 썼는데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십자편지를 만들어 쌀 위에 꽂았다. 그리고 그날따라 캄캄한 그믐 때라 간솔(소나무 진액이 나온 가지)에 불을 붙여 친구 몇과 함께 명순이네로 가서 문 앞에 살금살금 걸어가 그 쌀을 놓고 돌아왔다. 그날만은 세상에서 제일 부자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잤다.

이튿날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명순이 엄마가 며칠 후 꽁치 조림에 우리가 전해준 쌀로 밥을 해서 우리를 대접했다. 우리가 보낸 쌀인 줄 알면서도 쌀밥이 귀할 때이기도 하지만, 어린 마음에 생각이 짧아 꽁치 조림에 쌀밥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명순이 엄마가 친구들을 불러 앉혀놓고 “내가 너희들 앞에 할 말이 없구나. 내가 너희들에게 보답하는 길이 무엇일까? 저녁에 우리 집에 오면 내가 동화도 들려주고, 위인들의 이야기도 해주마. 내일 저녁부터 오너라”고 했다. 명순이 엄마의 마음에 짠함이 보였고, 표현할 수 없는 아스라함이 밀려왔다.

친구들과 나는 돌아오는 길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을 가누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있었다. 저 별들이 나에게 말을 했다. ‘세상에는 너 혼자 사는 것이 아니란다. 어울려 사는 것이지. 마치 우리가 이렇게 어울려 하늘에서 반짝이는 것도 혼자라서가 아니라 여럿이서 어울려 다정한 모습에 기분이 좋아 반짝이는 거야’ 하며 속삭이는 것이었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