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가슴 아픈 상처 아름답게 ‘포용’… 미술계 유망주 ‘붉은 산수’ 호평 이세현 작가
입력 2012-01-01 18:23
훈풍은 언제쯤 불어올 것인가. 한파에 잔뜩 움츠린 사람들, 이해관계가 꼬일 대로 꼬인 정치, 좀처럼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경제, 타협 없이 평행선을 달리는 사회, 김정일 사후에도 여전히 얼어붙은 북녘. 새해 미술계 유망주를 인터뷰하기 위해 지난 주말 이세현(45) 작가의 작업실이 있는 경기도 파주 임진강변을 지나면서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강렬한 붉은색으로 분단된 산하 등을 그려온 그의 ‘붉은 산수(Between Reds)’를 보는 순간, 마음 속 뜨거운 것이 꿈틀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 강한 이미지여서 한 번 보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 그의 작품에는 한국의 현대사가 빚어낸 가슴 아픈 풍경들이 용광로처럼 녹아 있다. 곳곳의 상처를 화면에 아름답게 포용하기에 ‘예술적 훈풍의 근원지’가 될 만하다.
작가는 2007년부터 우리 산하를 온통 붉은 물감으로만 칠하고 있다. 최근 작품에서는 천안함 침몰과 원자폭탄 폭발, 거북선과 전통가옥, 사라져 가는 솔섬 등을 붉게 반복적으로 그리고 있다. 겸재 정선의 전통산수와 서양화 기법의 풍경화가 어우러진 작품을 선보여 국내 화단에서 입지가 낮은 40대 중반 작가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최근 세계적 화랑인 미국 뉴욕의 페이스갤러리 산하 판화전문 페이스 프린츠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의 대표작들을 판화로 제작하자는 제안이다. 1968년 설립된 페이스 프린츠는 앤디 워홀, 장 뒤뷔페, 키스 해링, 척 클로스 등 국제 거물 작가만을 취급했다. 한국 작가로는 이우환이 유일했고 이세현이 두 번째로 합류한다.
“개인뿐 아니라 한국미술과 작가를 알리는 기회여서 기쁘다”고 소감을 밝힌 그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지금은 국내외 유수 미술관과 갤러리의 초청을 많이 받고 있지만 그의 ‘작가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어머니 고향인 통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일곱 살 때 부산 광안리로 이사를 간 후 가세가 기울어 전통공예고교에 진학했다.
틈만 나면 그림을 그리던 중 미대가 너무 가고 싶어 혼자 홍익대에 시험을 쳤다. 합격이었다. 그러나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내내 눈물만 흘리다 등록 마지막 날 합격통지서라도 받아가려고 학교에 들렀더니 장학생이라는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대학 시절에는 미술학원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대학 졸업 후 예고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새로운 작업에 대한 열망을 떨치지 못해 2004년 영국 첼시 아트컬리지로 유학을 떠났다. “영국에서 작업하면서 문화적 차이를 느꼈는데 그것은 자연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살던 한국의 산하, 분단의 상처와 사라져가는 것들의 풍경을 그려보자고 마음먹었죠.”
화면을 온통 붉은색으로 채색한 것은 군 복무 시절 군사분계선에서 적외선 투시경으로 본 장면을 표현한 것이고, 중간중간에 떠 있는 해안은 어머니 유골을 뿌린 통영의 바다를 묘사한 것이다. “황홀하게 아름답지만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한 곳, 개발 때문에 이제는 사라져버린 추억 어린 공간을 담았다”고 한다. 이런 풍경을 위해 5000여 컷의 사진을 촬영했다.
붉은색 때문에 “빨갱이 그림이냐”는 오해를 받은 적도 있지만 작품이 작업실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의 작품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미국), 올 비주얼 아트(영국), 제임스 유 컬렉션(중국) 등 세계 곳곳에 소장돼 있다. 올해도 각종 국제 아트페어와 해외 기획전이 예정돼 있고 가을에 학고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좋은 작품을 많이 발표하는 게 작가의 임무가 아닐까요. 작품을 통해 사회에 대해, 삶에 대해 관람객들과 소통하고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것으로 즐거운 일이지요. 열심히 하다 보면 작품 판매와 인기는 자연히 따라오지 않겠습니까?”
새해에는 ‘붉은 산수’를 더욱 발전시키되 과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꾀하는 작업을 구상 중이다. 이를 테면 ‘지옥 속의 무지개’처럼 아름답지만 허망·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이 존재하는 현실의 아이러니와 패러독스를 보여줄 계획이다. 노총각인 그가 더불어 이루고 싶은 간절한 소망은 가정을 꾸리는 일이다. 좀 더 안정된 환경에서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싶은 그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