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기의 溫 시네마-마이 웨이] 거대한 역사 흐름에 맡겨진 한 남자의 삶
입력 2012-01-01 18:03
준식은 관동군 사령부를 동료들과 탈출하기 직전, 노몬한 강 너머 몽골 초지를 떨게 하는 나지막한 울림에 사로잡힌다. 떨림은 점차 소련군 전차부대의 거대한 굉음으로 바뀌고 준식의 마음은 요동친다. ‘놔두고 일행들과 함께 탈출할 것인가? 아니면 적의 기습을 알려야 하나?’ 공포의 갈등은 수백 대의 전차를 눈으로 확인한 순간 긍휼로 바뀐다. 준식은 탈출한 동료들과 나중을 기약하며 일본군 진지로 사력을 다해 뛰기 시작한다.
준식이 출정을 준비하기 위해 도열한 일본군을 향해 소련군의 기습을 외칠 때, 일본군 대장 다츠오의 떨리는 시선에서 카메라는 직부감으로 솟아오르며 다시 익스트림 롱샷으로 준식의 뒤에 펼쳐진 언덕너머 사막에서부터 밀려오는 수백 대의 전차부대를 화면에 비춘다. 그렇게 전설적인 노몬한 전투가 시작된다.
영화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을 보여줬던 강제규 감독이 ‘마이 웨이’로 2011년 마지막 한국영화 대작을 완성했다. 이번에는 장동건, 오다기리 조, 판빙빙 등 한국 일본 중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캐스팅과 약 300억원 예산으로 이전까지의 규모보다 한 단계 올라섰다.
‘마이 웨이’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때이자 세계사의 격변기인 일제강점기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다. 1930년대 후반, 한 조선인이 중국에서 소련으로 넘어갔다가 독일로 향한 뒤, 노르망디 해변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실화를 소재로 한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맡겨진 한 개인은 어떻게 살아갔을까? 지극히 실사적인 담론을 강 감독은 준식과 다츠오라는 조선과 일제를 대표하는 캐릭터로 영화적 스토리를 형성하고 거기에 종대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로 서브 플롯을 엮어냈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한 지 10년이 지난 즈음에 둘은 조선과 일본을 대표하는 마라톤 선수로서 대회에 참가한다. 준식은 이 대회에서 우승하지만 일제는 그에게 실격을 선언하고 다츠오에게 우승자 트로피를 건네준다. 종대를 비롯한 조선 청년들이 이에 격분하여 난동을 일으키고 그 길로 만주국 관동군으로 끌려간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매 순간 생사의 갈림길에서의 준식의 선택이다. 앞서 묘사한 노몬한 전투에서 준식은 소련군의 기습 뒤에 남겨진 다츠오를 포함한 일본군을 선택한다. 소련군으로 참전한 독일군과의 전투에서도 다츠오를 구한다. 이 긍휼의 마음은 준식 자신이 포로로 붙잡은 중국인 저격수 쉬라이가 고통받고 있을 때, 그녀의 가장 소중한 기억인 가족사진이 들어 있는 수첩을 찾아 건네주는 장면에서 포착할 수 있다.
희생적인 준식의 선택은 크리스천의 긍휼과 같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종대는 요동치는 시대의 격변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변해가는 모습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일본군 안에서는 핍박받는 조선인으로, 소련군 포로수용소에서는 어깨에 완장을 차고 일본군 포로를 감독한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소련군으로 독일군에 대항한 전투에 참전한다. 종대역의 김인권은 가장 현실감 있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준식의 캐릭터는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고 종대는 생동감을 불어 넣는다. ‘마이 웨이’를 풀어가기 위해 준식은 이타를 선택하고 강 감독은 사실적이고 스펙터클한 전투장면을 택했다. 폭탄을 두르고 BT-7 소련제 탱크를 향해 육탄 돌격하는 노몬한 전투는 가히 아비규환을 그대로 옮긴 듯하고 피아 구별 없이 무차별 살육전이 벌어지는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투는 지옥 그 자체이다.
라스트 신으로 재현한 노르망디 전투 장면은 강 감독 자신만이 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항변하듯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장면으로 기록될 만하다. 장동건과 오다기리 조가 보여주는 팽팽한 긴장감과 카리스마는 이 영화의 또 하나의 볼거리이다. 국내외에서 ‘마이 웨이’의 흥행 여부는 2012년 한국 영화 산업의 흐름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시험지이다.
(서울기독교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