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44) 기독교와 사회변화 <5>문맹퇴치

입력 2012-01-01 18:00


기독교가 한국에 준 또 하나의 변화는 문맹퇴치와 한글의 재발견이었다. 기독교가 한글 보급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은 이광수, 최남선, 최현배, 이응호 등에 의해 주장되어 왔다. 종교가 언어나 문학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이미 역사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이슬람교의 꾸란(Quran)은 처음에는 뼈 조각이나 종려나무 잎사귀에 기록되었다. 이것이 아람어의 형성과 보급에 기여하였고, 결국 아라비아 문학의 걸작이 된 것은 종교와 언어와의 관련성을 암시해 준다.

루터가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1522년) 출판한(1523년) 일은 독일어의 보급과 일상화에 영향을 주었고, 1611년의 흠정역성경(King James Version)의 출판은 영어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비록 한글은 세종(1397-1450)에 의해 1443년 창제되었고, 3년간의 시험 기간을 거쳐 1446년 ‘배우기 쉽고 일상생활에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28글자’의 훈민정음으로 반포되었으나 그것은 제한된 범위에서만 사용되었다. 현대 언어학자들의 주장처럼 과학적 언어로 창시되었고 일상화될 수 있는 언어였으나 절대다수의 서적은 여전히 한문으로 저술되었고 한글은 천시되고 있었다. 이 점은 우리글 이름의 변천사에도 드러나 있다. 한글이 창제된 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불렸으나, 후에는 언문(諺文)으로 불리기도 했다. 중국 글을 한문(漢文) 혹은 진서(眞書)라고 부르면서 우리글을 ‘상스러운 말을 적은 글’이라는 의미의 언문(諺文) 언서(諺書) 언자(諺字)라고 불렀다. 갑오경장 이후에는 국어(國語) 국문(國文)으로, 경술국치(1910) 이후에는 ‘조선어’로, 후에는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부르게 된 것이다.

갑오경장(1894) 이후 칙령을 발표하여 한글을 국가의 공식문자와 국문으로 인정했으나 여전히 한문이 선호됐다. 이처럼 한글은 천시되던 언어였으나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널리 사용되었다. 만주에서 번역된 최초의 신약 단권성경은 순 한글로 역간되었다. 천주교는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했으나 개신교는 처음부터 한글만을 사용했다. 만주에서 첫 성경번역본인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1882년 각 3000부씩 인쇄된 이후 단권 신약성경은 3000부에서 1만부씩 발간되었고, 1883년부터 1886년 어간에 단권성경 번역본 1만6000권이 보급되었다. 최초의 신약성경본인 1887년의 ‘예수셩교젼셔’ 초판본은 5000부가 발간되었고 계속 중간되었다.

선교사의 내한 이후 국내에서도 성경번역이 착수되어 1887년부터 1900년까지 출판된 성경은 24만1250권에 달했다. 한글찬송가는 1892년 발간되기 시작하였는데, 1908년에는 장로교, 감리교 합동의 ‘찬숑가’ 초판본이 6만부 발행되었다. 1910년까지만 22만5000권이 발행되었다. 이때까지도 한문 혹은 국한문혼용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나, 한국교회는 한글전용 성경과 찬송가 보급을 통해 문맹퇴치와 한글 보급에 기여하였다. 후에 대한성서공회는 독자들의 기호를 고려하여 국한문 혼용성경을 출판하기도 했으나, 순 한글 성경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1895년부터 1936년까지 1808만권의 한글 성경이 보급됐다. 그 외에도 각종 기독교문서, 교회학교교재, 기독교신문, 잡지 등은 한글 보급의 통로였다.

그래서 이광수는 ‘야소교(耶蘇敎)가 조선에 준 은혜’ 가운데 한글보급을 중시했다. 그래서 “아마 조선글과 조선말이 진정한 의미로 고상한 사상을 담는 그릇이 됨은 성경의 번역이 시초일 것이요, 만일 후일에 조선 문학이 건설된다 하면 그 문학사의 제일면에는 신구약의 번역이 기록될 것이외다”라고 썼다. 최현배는 ‘기독교와 한글’이라는 논문에서, 기독교가 한글에 준 공덕 6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기독교는 한글을 언문이라고 멸시하던 시대에 한글을 민중 사이에 전파하였고, 둘째,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목사의 활동을 통해 신자들은 말을 배우고 글을 읽고 쓰는 방법을 깨우치게 되었다. 셋째, 한글에 대한 존중심을 갖게 하고 한글을 지키는 마음을 심어 주었고 넷째, 게일을 비롯한 선교사나 교회 지도자들이 한글의 과학적 가치를 인정하였다. 다섯째, 선교사들의 한글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배달의 말글이 세계에 전파되었다. 여섯째,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한글전용 성경, 찬송 및 문서 발간을 통해 한글만 쓰기의 기운을 조성하였다.

기독교가 한글 보급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국어학자 김윤경, 조윤제, 조연현 등도 인정해 왔다. 특히 이만열은 ‘개신교의 한글정책’이라는 글에서 한국교회가 한글보급과 한글 운동에 준 의의를 몇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개신교는 처음부터 선교 정책적으로 한글전용을 지향하여,‘한글의 대중화·보편화운동을 본격화했고, 한국의 언어를 한국의 문자로 정착시키는 데 공헌했다. 둘째, 교회와 기독교 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쳐 국문을 깨우치게 하는 등 문맹퇴치에 기여했다. 셋째, 교인이나 학도들로 하여금 자기 의사를 한글로 표현하도록 훈련하는 과정을 통해 개신교의 한글운동을 확산하였다. 이를 통해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능력을 배양하였고, 닫혔던 마음을 열게 하고 잠재된 재능을 발휘하게 했다. 넷째, 개신교의 한글운동은 번역문화와 인쇄문화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즉 개신교의 한글운동은 한국의 초기 인쇄, 출판문화에도 자극을 주었고, 이것은 한말 계몽기의 광범위한 근대문화운동을 태동시키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개신교의 한글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문자보급, 문맹퇴치만이 아니라 한말 전통적 문화구조를 변혁시키는 포괄적인 차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이만열의 주장은 그릇되지 않는다.

<고신대 교수,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