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고문 딛고 독재와 싸운 ‘민주화 대부’… 김근태 상임고문 인생역정

입력 2011-12-30 18:58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에 투신해 모진 고문까지 겪은 ‘민주화의 대부’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생전 김 고문과 정책을 놓고 충돌한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그의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열등감을 느낄 정도’라며 경의를 표했다.

특히 85년 9월 민청련 의장 시절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에 끌려가 23일간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으로부터 혹독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았다. 김 고문은 같은 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돼 1심에서 징역 7년, 2심에서 징역 5년을 각각 선고받았으나 88년 7월 특별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이후 콧물 흘림과 손 떨림, 단기기억 상실 등 심각한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정치활동을 활발하게 할 때도 김 고문은 늘 손수건을 들고 다녔다. 물고문을 받을 때 고춧가루 물을 코로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걸린 만성 비염 때문이었다. 전기고문 후유증으로 가끔 말이 어눌해질 때도 있었다. 머리도 한쪽으로 기울어진 경우가 많았다.

그는 95년 초 지방선거를 앞두고 재야인사들을 이끌고 당시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듬해 서울 도봉갑에 출마해 국회에 진출한 이래 같은 지역구에서 내리 3선을 했다. 그러나 2008년 총선에서 낙선했다.

결이 곧으면서도 좀처럼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어 국회 출입기자들이 가장 신사적인 의원에게 주는 ‘백봉신사상’을 네 차례나 수상했다. 그러나 원칙과 소신에 맞지 않으면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당시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이 압승한 뒤 같은 해 9월 노무현 대통령이 아파트 분양원가를 공개하기로 했던 당의 총선 공약을 뒤집자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며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원내대표 시절 김 고문은 이라크 파병에 반대했고 표결 때 반대표를 던졌다. 노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추진할 때도 “나를 밟고 가라”며 맞섰다.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된 뒤에는 이헌재 당시 경제부총리가 경기부양책을 위해 국민연금을 동원하자 제동을 걸었다. 그는 복지부 홈페이지에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올려 “하늘이 두 쪽 나도 국민연금을 지키겠다”며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김 고문은 2007년 파킨스병 진단을 받은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가 취미인 축구와 등산을 하면서 회복해 정치를 재개했다. 그가 내년 4월 총선 출마를 준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때 건강이 호전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지난달 29일 몸 움직임이 갑자기 둔해지면서 병원을 찾았고 뇌정맥혈전증 증상을 보여 치료를 받아왔다. 건강은 지난 10일 치러진 딸 병민(29)씨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만큼 악화됐다.

김 고문은 “내가 정치에 안 어울리는 사람인가 싶을 때도 있다”고 말하곤 했다. 2002년 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후보 아홉 명이 한 줄로 앉아 있다가 한 명씩 차례로 나가 뒤에 있는 사람들을 신나게 헐뜯고 뒤돌아서선 서로 웃으면서 악수하더라. 나는 신나게 (상대방을) 공격할 수도 없었고, 웃으면서 악수할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를 하기엔 너무 맑고 곧은 사람이었다.

전석운 신창호 기자 swc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