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좇은 두 남녀, 그리고 홀로 남겨진 아이… 최윤 교수 8년만의 신작 장편 ‘오릭맨스티’
입력 2011-12-30 18:21
소설가이자 서강대 프랑스문화과 교수인 최윤(58)이 8년 만에 신작 장편 ‘오릭맨스티’(자음과모음)를 냈다. 더 나은 세속의 삶을 추구하려고 발버둥쳤던 짧고 불우한 인생이 어떤 방식으로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고 변화하는지를 냉정하고 절제된 문장으로 풀어놓은 작품이다.
소설 속 여자는 젊음 외에는 이 세상에 내세울 것이 없다. 좋게 말하면 평범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평균 미달의 집안과 학력과 외모와 직업을 가졌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세속적 욕망과 계층 상승의 꿈이 도처에 존재했던 1980년대 서울. 여자는 자기 삶을 더 나은 단계로 진입시키기 위해 결혼을 선택한다. 남자도 젊다. 그는 50대 후반 할머니라기에는 아직 젊은 편모슬하의 2대 독자다. 탄탄한 중견기업의 촉망받는 영업사원인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친사회적 성격과 선량한 겉모습을 지녔지만 내면에는 미지근한 쾌락에 대한 촉수만이 살아 있을 뿐이다. 딱히 열망하는 것도, 절박한 충동도 없다. 그 역시 남들과 다를 바 없이 결혼을 선택한다.
그리고 ‘나’가 있다. 그들이 낳은 아이다. 태어났을 때의 이름은 박유진. ‘나’는 두 살 때 부모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벨기에로 입양 간 후 유진 뒤발이라는 이름으로 성장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원인불명의 병을 앓는다. 급작스러운 혼절과 의식불명이 증상인 이 미증유의 희귀병에 시달리는 것만 제외하면, 그래서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을 제외하면 ‘나’는 가족의 헌신적인 애정과 보호 속에서 자란다. 마치 스위치를 내리는 듯 의식이 끊어지는 순간을 ‘나’는 블랙홀 여행이라 부른다. 그리고 서서히 의식을 되찾으면서 무의식중에 중얼거리는 소리는 언제나 단 하나다. ‘오릭맨스티….’
“입술이 그 음절들을 반복하는 동안 나는 깨어난다. 천천히 미미하게. 그렇게 여행은 끝난다. 어느 날 엄마는 그것이 단순한 숨소리나 헛소리가 아님을 알아차린다. 엄마는 내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비슷하게 반복되는 속삭임을 닮은 그 음들을 받아 적었다. 오릭맨스티. 오릭맨스티. 오릭맨스티. 엄마의 수첩 한 귀퉁이에 세 번 반복적으로 쓰인 글씨다.”(196쪽)
오릭맨스티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음절의 나열이지만 ‘나’를 살아가게 하는 하나의 숨구멍이자 정화장치인 것이다. “세상에는 뜻으로 번역되지 않는 언어의 신비로운 지대가 있다. 오릭맨스티는 그런 언어의 한 조각이다.”(199쪽)
벨기에의 한국어 개인 교사인 마담 배를 통해 자신을 낳아준 한국의 친어머니 쪽 친척들을 찾게 된 ‘나’는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친부모를 앗아간 교통사고의 전말을 알게 된다. “중부지방을 강타한 기록적인 집중호우와 강풍으로, 8월X일 J지역 계곡에서 야영 중이었던 한 쌍의 남녀가 차 안에 갇힌 채, 차량과 함께 추락사했다고 지역 경찰서는 발표했다. 사망한 박모씨(남, 31세)와 윤모씨(28세)는 부부 관계로 신원이 밝혀졌으며, 거의 사흘을 야영지의 텐트에 고립되어 사경을 헤매던 아들 박모군(2세)이 마침내 구조되어 현재 인근 병원에서 입원 가료 중이다.”(210쪽)
‘나’는 사고 차량에서 극적으로 구조됐던 것이다. 마침내 ‘나’는 한국을 방문해 부모의 사망 장소를 찾아간다. 그 장소에 서 있는 ‘나’가 바라본 것은 붉게 저무는 석양, 우리가 잃어버린 언어, 오릭맨스티다. 최윤은 “언어의 확장된 기능을 통해 때로 정화도 일어나고 회복도 가능하다. ‘오릭맨스티’는 그런 언어를 경험하면서 또한 갈망하면서 씌어졌다”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