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비극의 현장 세밀하게 관찰… 서효인 시집 ‘백년동안의 세계대전’
입력 2011-12-30 18:21
“아이티에서 진흙 쿠키를 먹는 아이를 보면서 밥을 굶지 말자, 진흙 같은 마음을 구웠다. 내전이 빈번한 나라처럼 부글부글 끓는다. 라면 같은 그것을 날마다 먹어야 한다. 스스로를 아끼자, 스프 같은 마음을 삼켰다. 한 장의 휴지를 아끼기 위하여 코를 마셨다”(‘마그마’ 부분)
지진이 휩쓸고 간 아이티의 비극을 TV로 지켜보는 시적 화자는 직접 체험이 아니라 간접 체험의 방식으로 그 상황을 재현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세계’인 3인칭의 세계를 1인칭의 정감으로 표출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우회의 진정성’이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제30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인 서효인(30·사진)의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민음사)은 시 ‘마그마’에서 보여주듯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폭력과 비극의 현장에 대해 진술하면서도 ‘우회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매력을 발산한다. 아이티의 굶주린 아이들처럼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진흙 쿠키를 먹지는 않았지만 진흙 쿠키를 보면서 ‘진흙 같은 마음을 구을 수 있는 시인’이 서효인인 것이다.
그렇기에 서효인의 시적 화자는 전혀 강박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시적 화자를 일러 ‘잔혹 동화 속의 악동’으로 지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악동의 시선은 지난 백 년간 세계를 휩쓸고 간 전쟁이나 사회적 폭력, 그리고 비극의 현장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아이티부터 르완다, 헤르체고비나, 다마스쿠스, 체첸, 오키나와, 스탈린그라드, 관타나모까지….
“구멍에 손을 집어넣는 것으로 시작하자 가장 깊게 들어간 손마디에 씻을 수 없는 냄새가 밴다 여기는 섬이고 축축한 바람이고 떨리는 동굴이다 제임스 일병이 석양을 등진 국기에 거수경례한다 씻을 수 없는 것은 씻지 않은 채로 둬야 한다고 장엄한 연주를 가르쳐 준다”(‘관타나모 포르노’ 부분)
서효인이 시에서 부리는 시적 화자, 즉 병사들은 제임스 일병처럼 비윤리와 비도덕, 그리고 퇴폐가 난무하는 또 다른 전선에 투입된다. 이들 병사는 만국의 개인들의 울부짖음으로 굉음을 내는데 이 굉음은 세계적 차원의 윤리와 사회적 정의, 그리고 연민과의 교신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교신음이야말로 서효인이 새로운 정치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서효인이 시로 구축한 전선(戰線)은 피와 살점이 튀는 전쟁터에 있지 않고 ‘나’의 안에, ‘개인’의 내부에 그어지고 있다. 그게 ‘우회의 진정성’인 것이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