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수교 20년] “수교할 것” 中 통첩에 김일성 “자주노선 걷겠다”

입력 2011-12-30 21:25


권병현 前 주중대사가 밝히는 숨막혔던 외교전

한편의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 은밀한 지령과 극비교섭, 비밀 합의, 그리고 최후통첩. 1992년 한·중 수교 뒤에는 숨막히는 3개월여의 외교전(戰)이 숨어있다. 그 주인공 권병현(72) 전 주(駐)중국대사를 지난 30일 한중문화청소년협회(미래숲) 사무실에서 만났다.

◇92년 5월6일=이상옥 외무부(현 외교통상부) 장관이 주 미얀마 대사직을 마치고 막 복귀한 권 대사를 조용히 불렀다. 그에게는 ‘한·중 수교 예비교섭 대표’란 직책이 주어졌다. 김석우 아주국장(현 동북아국장)과 신정승 동북아2과장이 합류했다. 다음날부터 이들 3명은 서울 동빙고동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안가’에 배치돼 역사적인 한·중 수교 비밀회담 실무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국내에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노태우 대통령과 김종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 이 장관, 교섭대표단 등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권 대사는 고향의 부친이 병환 중이라 시골에 내려가 있는 것으로 위장했고, 신 과장은 병가를 내고 입원한 것으로 가장했다. 김 국장은 밤중에 안가에 와 권 대사가 준비한 보고서를 이 장관에게 전달하는 연락책을 맡았다.

◇5월13일=대표단이 꾸려진 지 일주일 만에 베이징(北京)에서 1차 비밀회담이 사흘 동안 열렸다. 권 전 대사를 비롯한 대표단 3명은 007작전을 펴듯 각자 다른 루트로 베이징에 들어갔다. 그러나 회담은 양국 입장 차만 확인한 채 끝났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며 우리에게 대만과의 단교를 요구했다. 하지만 임시정부 시절부터 건국과정까지 대만에 큰 빚을 졌던 정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앞이 캄캄했어요. 극비리에 추진하는 만큼 수교를 조기에 달성해야 하는 부담감이 컸지요. 무엇보다 대만이나 북한에 새어 나갈까봐 노심초사했습니다.” 권 전 대사의 회고다.

◇6월21일=6월 2∼3일 베이징 2차 회담에서 차이를 좁힌 양국은 21∼23일 서울에서 마지막 3차 회담을 열고 드디어 수교에 합의했다. 이어 7월 29일 노창희 외무차관이 베이징을 방문해 쉬둔신(徐敦信) 외교부 부부장과 면담해 한·중 수교 공동성명 합의문에 가서명했다. 수교 발표일(8월 24일)까지는 약 1개월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문제는 한·중 수교로 타격이 불가피한 대만과 북한에 어떻게 최후통첩을 하느냐였다. 대만과 북한은 각각 자국의 최대 우방국인 한국과 중국이 어디선가 수교를 논의하고 있다는 눈치를 채고 이를 추적하고 있었다.

◇7월15일=중국이 먼저 움직였다. 7월15일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김일성 주석의 묘향산 별장을 찾았다. 첸 부장은 한·중 수교를 공식 추진하고 있다는 장쩌민(江澤民)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구두메시지를 전했다. 김 주석은 매우 침통한 표정으로 “우리는 자주노선을 걷겠다. 중국이 하는 일은 중국이,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가”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중국에 대한 강도 높은 배신감과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중국은 앞서 한국과의 수교 지침을 정한 직후에 이를 북한에 암시했었다. 정확히 석 달 전 4월15일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이 김 주석의 80세 생일 축하행사 참석차 평양을 방문해 “이제는 한국과 관계를 정상화할 때가 가까웠다”고 운을 뗐다. 김 주석은 “수교를 2∼3년만 늦춰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미국이 북한을 인정하고 중국이 한국을 인정하는 ‘교차승인’ 구상을 꺼내들며 북미 관계가 진전될 때까지 ‘보조’를 맞춰 달라는 얘기였다.

권 전 대사는 “구소련 붕괴 이후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중국이 남한과 수교한다는 통보는 김 주석에게 큰 외교적 고립감을 줬을 것”이라며 “북한은 그때부터 ‘믿을 것은

핵(核) 뿐’이라는 인식 속에 핵무기 개발에 매달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 북한은 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며 1차 핵 위기를 촉발시켰다. 우리 정부는 수교 1주일 전, 이 장관이 진수지(金樹基) 주한 대만대사를 불러 알렸고 대만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급기야 한·중 수교 이틀 전인 8월22일 대만 첸푸(錢復) 외교부장은 한국과 단교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8월24일 그리고 20년=우여곡절 끝에 역사적인 한·중 수교가 발표됐고 20년이 흘렀다. 권 전 대사는 “한·중 수교는 어떤 면에서 북한의 핵개발을 부추겼고 북핵 6자회담이 추진되고 있는 지금까지 그 영향력이 계속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후에도 북한은 핵 카드를 쉽게 버리지 않을 것”이라며 “6자회담을 통해 어린 아이가 가진 위험한 장난감을 빼내는 데 주변국들이 협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남북관계가 막혀 있고서는 한반도 정세가 안정될 수 없다. 융통성 있게 가져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권 전 대사=65년 14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수석 합격해 외교부에 들어온 후 중국과장과 아주국장 등을 거친 중국통이다. 2003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한·중 청년교류와 사막 녹화사업에 앞장서고 있다.

백민정 기자 min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