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전정희] 이준석 군, 이준석 위원님

입력 2011-12-30 18:31

개화사상가인 김옥균(1851∼1894)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21세 때였다. 알성시를 통해서였다. 수석 합격자였던 그는 23세에 홍문관 교리가 됐다. 홍문관원은 경연관(經筵官)을 겸하였으므로 왕에게 강론할 만한 학문과 인격을 갖춰야 했다. 왕의 교서를 작성할 수 있는 문장력은 필수였다.

그는 강론을 통해 고종에게 강학과 시무에 힘쓸 것을 호소했다. 이후 김옥균은 삼사인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을 두루 거쳤다. 20대에 엘리트관료의 필수 코스를 밟은 것이다. 고종은 1883년 그를 호조 참판이자 동시에 외아문 협판으로 임명해 총애했다. 출셋길을 달리면서 조선의 근대화에 주도적 역할을 할 여건이 주어졌다.

동남제도개척사도 겸하는데 울릉도, 독도 등 동남쪽 국토를 외교적으로 지키기 위한 관직이었다. 김옥균은 이때 당시로선 꿈도 꾸지 못할 벤처 마인드로 일을 한다. 즉 울릉도 개발을 위해 일본 회사 자본을 끌어들여 성과를 거둔다. 울릉도를 포함한 동남제도가 확고한 조선의 영토, 영해임을 근대적 계약을 통해 못 박은 것이다. 그가 이때 제작한 ‘조선여지도’에 울릉도와 독도는 강원도 영역으로 표시됐다.

이런 그를 두고 황현은 “재예(才藝)가 얇다”고 평가절하 했다. 세간에선 “왕의 총애를 받아 현달했다” “가세에 의지해 벼슬길에 올랐다”고 쪼아댔다. ‘개화’와 ‘독립’의 효용을 늙은 조선의 관료들은 인정하지 않고 견제했다. 결국 청의 외압을 떨쳐내고 부국강병으로 가는 것이 목표였던 젊은 엘리트관료는 ‘갑신정변’이라는 혁명적 사건을 통해 목표를 성취하려 했으나 민을 혁명에 동참시키지 못해 삼일천하로 끝나버렸다. 그의 나이 서른 셋 때의 일이다.

새삼 김옥균을 거론한 것은 남·북한의 약관 두 사람 때문이다. 한나라당 이준석 비상대책위원은 26세, 김정일을 세습한 김정은은 28세. 어느 날 훅 나타나 ‘정세의 중심’에 섰다. 쓸데없이 나이만 먹은 것 같은 베이비 부머 세대라 그런지 홍위병에 쫓기는 기분이다.

뭐 김정은이야 그렇다 치자. 하지만 이준석 위원에겐 기대하는 바 크다. ‘트위터 재예’에만 몰두하지 말고 김옥균과 같이 호연지기할 일이다. 한데 거참, 위원들 면면이 감동이 없다. ‘너무들 잘났다.’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