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익두 목사의 탈북 손자며느리 “김정일 죽었지만 재스민 혁명은 없을 것”
입력 2011-12-27 10:14
지난 1997년 남편은 중국에서 북송돼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탈북 후 성경공부를 하고 한국인 목사를 만났다는 죄목이었다. 굶어 죽을 수는 없었다. 3남매와 함께 남한으로 왔다. 북한 청진을 떠나 도착한 도시는 낯설기만 했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적응은 쉽지 않았다. 자신이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대부 고 김익두(1874∼1950) 목사의 손자며느리라고 밝힌 그녀는 그동안 북한 공산체제에 속아 살아온 세월만 떠올리면 화가 난다.
지난해 10월 탈북한 박문희(65)씨를 27일 오전 서울 사당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녀는 김일성 김정일 정권과 함께 살아온 세월을 후회했다. 그녀는 북한에서의 생활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김정일이 사망했지만 북한에서 리비아 같은 재스민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군부 쿠데타 가능성도 희박합니다.” 최근 북한 상황을 진단한 그녀의 견해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 현지 속사정을 잘 모른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북한에서 준의사(의사 아래 직급)로 일해온 그녀는 탈북한 뒤 북한교회세우기연합 산하 북한선교전문대학원에 다니며 북한 선교사가 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제가 탈북한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북한은 90년 중반부터 식량 배급이 끊겼고 집에 있는 물건을 팔아 멀리 농촌에 가서 식량으로 바꿔 먹곤 했지요. 고민 끝에 중국에 있는 친척을 찾아 98년 두만강을 헤엄쳐 건넜고 이후 두 차례 북송되는 등 고초를 겪었지요. 북한 단련대와 교화소 생활은 정말 끔찍했어요. 기독교인이라 더 힘들었지요. ”
그녀는 남편이 사망한 뒤 두차례 탈북했다가 붙잡혀 모진 고초를 겪었다. “남편 김광수씨는 한국교회 초기 부흥사인 할아버지 김익두 목사의 3남2녀 중 장남의 아들입니다. 시할아버지 김익두 목사님은 1950년 10월 14일 황해도 신천교회에서 새벽예배를 드리다 순교하신 것으로 압니다. 당시 8살이던 남편이 피 흘리는 그 순교 현장을 지켰다고 해요.돌아가실 때 "공산군을 용서하라"고 유언하셨다는 데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박씨도 시할아버지가 한국교회 신유·부흥 운동의 대부로 불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북한에서 몰래 예배를 드렸다는 그녀는 지하 처소에서 예배드리고 교화소 수용자에게 전도도 했다고 전했다.
“북한의 종교는 ‘수령주의’입니다. 북한에선 김일성을 ‘민족의 태양’이라고 합니다. 북한에서 예수님은 김일성이고 김정일인 셈이지요. 이제 김정은에게 3대 세습을 한다고 하니 북한 주민들이 불쌍합니다.”
박씨는 이번에 대북선교단체인 모퉁이돌선교회 ‘광야의소리’가 성탄예배를 공개적으로 드린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 예배가 성탄절 날 북한 전역에 방송돼 감개무량하다는 박씨는 “남한생활은 여러 가지로 어렵지만 자유롭게 예배드리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어 행복하다”며 “남한교회와 정부에 감사한다”고 했다.
북한 선교사의 길을 모색하는 가운데 10여 차례 교회에서 간증도 했다는 박씨는 하루속히 남북이 평화통일이 돼 고향으로 돌아가 시할아버지 같은 복음 전도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피력했다.
글·사진=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