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진교] 하이닉스와 기업가 정신

입력 2011-12-26 18:08


얼마 전 만난 외국의 경영대학원 교수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영어에 서투른 한국 유학생들이 평소에는 조용히 있다가도, ‘경영전략’ 시간에 ‘후발자였던 한국이 어떻게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1등이 되었는가’에 대해 토론할 때면 눈을 반짝이며 토론을 흥미롭게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최근 한국을 방문해 많은 기업인과 학자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이 세계 정상에 오르게 된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 주요한 동인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리스크를 지고 과감한 투자를 하거나 창조적 활동을 통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업가 정신을 1980∼90년대 이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고 한다. 같은 기간 한국의 오너경영자들은 모험으로 비쳐질 정도로 과감한 투자를 감행해 일본을 추월하는 드라마를 연출하였다.

최근 SK그룹 최태원 회장이 전격적으로 하이닉스 본사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업가 정신’과 ‘베스트타이밍’이 만나는 또 하나의 기회가 한국 경제에 주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닉스는 글로벌 금융위기, 반도체 시황 외에도 SK에 대한 검찰 수사 등으로 경영정상화 차질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최 회장은 “반도체 산업은 시간과의 싸움이 최고 경쟁력이고, 하이닉스의 빠른 성장을 위해 뛰겠다”고 강조했다. 기업가 정신(성장, 투자)과 타이밍(시간) 두 가지 모두를 정확히 언급한 것이다. 검찰 수사로 인한 차질을 우려해 하이닉스를 찾은 것도 기업가 정신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하이닉스가 어떤 회사인가? 현대그룹에서 2001년 분리돼 독립경영에 나선 이후 채권은행단이 주도한 여러 차례 국내외 매각이 실패를 거듭하다 지난 11월 SK그룹이 우선인수협상 대상자로 선정된 굴곡의 10년을 견딘 회사다. 그 10년 동안 하이닉스는 글로벌 3등 기업 마이크론, 지금은 시장에서 퇴출된 인피니온에까지 헐값 매각될 뻔했던 치욕을 겪으면서도,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2위 업체로 당당히 올라섰다.

하이닉스는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근본적인 경영돌파구 마련이 절박했다. 그간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로서 선방해 왔지만, 앞으로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나서지 않으면 도태될 상황이었다. 대만 업체 등 주요 경쟁자들은 글로벌 경기침체를 맞아 한계상황에 직면해 있는 만큼, 산업 내 누군가 과감한 투자를 통해 주도권을 잡고 나가면 기선을 제압할 수 있는 타이밍인 셈이다.

하이닉스로서는 바로 이런 베스트 타이밍에 기업가 정신이 가세하면, 언제라도 세계정상을 향한 패스트 트랙에 올라탈 기회를 잡게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건 하이닉스만의 생존과 승리가 아니라, 한국경제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에 이어 또 하나의 글로벌 승자를 얻게 되는 기회이다. 국민과 정부가 힘을 모아 줄 때다.

김진교(서울대 교수·경영전문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