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철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입력 2011-12-26 18:06
“정신이 물질에 자리를 내준 이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상징은 무엇일까”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것을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의 논리만으로 설명할 순 없다. 출발부터 다른 경우가 허다한데 공정한 경쟁이라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기업 간의 경쟁도 그렇고 입사경쟁이나 입시경쟁도 모두 이런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렇다고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고용자 수가 600만명을 넘어서고 있다. 우리 사회가 불신과 불안으로 가득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비정규직 문제도 큰 몫을 차지할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도 우리 자신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소용없지 않은가. 인정받기 위해, 상징을 갖기 위해 모두가 애쓰고 있다.
나비들 중엔 참으로 근사한 이름을 가진 것들이 많다. 번개오색나비도 그들 중 하나다. ‘번개’라는 낱말이 나비의 외양이나 속성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새들도 번개오색나비를 함부로 공격하지 않는다고 하니 범상치 않은 상징을 가진 나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애초의 번개오색나비 또한 여느 나비들처럼 약했던 터라 다른 나비들처럼 새들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새들의 공격으로 번개오색나비들은 무참히 죽어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번개오색나비들은 새들의 공격을 피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궁리한들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작은 새 한 마리가 번개오색나비를 잡아먹으려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번개오색나비 바로 앞까지 다가온 작은 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번개오색나비를 잡아먹으려는 순간, 푸드득 소리와 함께 커다란 올빼미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날아와 작은 새를 낚아챘다. 번개오색나비는 올빼미 덕분에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올빼미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작은 새를 움켜쥔 채 근처 나무에 앉아 있었다. 번개오색나비는 한참동안 올빼미를 바라보았다. 올빼미 눈빛이 무시무시했다. 번개오색나비는 올빼미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올빼미가 될 수만 있다면 작은 새들로부터 죽음을 당하지 않을 거라고, 번개오색나비는 생각했다. 하지만 나비가 올빼미가 될 수는 없었다.
번개오색나비는 오랫동안 고심하다가 자신의 날개 위에 올빼미눈알을 선명하게 만들어 놓기로 했다. 올빼미가 될 수는 없었지만 올빼미처럼 보이게 할 수는 있었기 때문이다. 날개 위에 올빼미눈알무늬를 만드는 일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번개오색나비는 마침내 자신의 양쪽 날개 위에 무시무시한 올빼미눈알무늬를 만들어 놓았다. 올빼미눈알무늬가 완성되기까지는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천 년이나 만년이 걸렸는지도 모른다. 그 이상이 걸렸는지도 모른다.
그 후론 번개오색나비를 잡아먹으려고 작은 새들이 날아왔다가도 올빼미인 줄 알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줄행랑을 쳤다. 가짜 올빼미눈알무늬는 작은 새들을 겁주기에 충분했다. 어쩌다가 뭣 모르고 덤벼드는 새들도 있었지만, 새들은 강한 부리로 번개오색나비의 날개에 있는 올빼미눈알무늬만 공격했다. 상대방의 눈을 공격해 치명상을 입히려 했던 것이다. 새들이 강한 부리로 쪼아댄들 하늘하늘한 나비날개가 치명상을 입을 리 없었다. 새들이 가짜 눈알을 공격하는 사이 번개오색나비는 오히려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번개오색나비의 진화는 아픔이 만들어준 오랜 시간의 진화일 것이다. 상징이 필요한 이 시대에, 상징이 없으면 무시당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으로 상징을 만들 것인가. 정신이 물질에 자리를 내어준 이 시대에,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상징은 무엇인가.
이철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