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의 시편] 폐선에서도 다시 부를 새 아리아

입력 2011-12-26 18:36


나이팅게일은 전쟁터에서 수많은 병사들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 젊은 병사들이 죽어갈 때 거의 모든 병사들이 마지막으로 외쳤던 외마디가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였다. 그들은 사랑하는 애인이나 아내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어머니를 부르며 죽어갔다. 유대인들이 나치정권 때 포로수용소에서 죽어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독가스실에 불려가기 전에 벽에다가 어머니 혹은 하나님의 이름을 써 놓았다고 한다. 독가스실로 끌려가면서 마지막으로 외쳤던 이름, 어머니. 어머니의 가슴에는 따뜻한 사랑과 위로, 절박한 희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올 한 해 한국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면 참혹한 전쟁터 같았다. 총과 칼만 안 들었지 서로를 상처주고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처럼 고소와 고발, 법정 싸움이 난무했다. 그러면서 어느덧 사람의 발자국마저 지워져 버린 황량한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절망과 수치, 패배와 굴욕의 쓰라린 기억이 폐부를 찌른다. 마치 돛이 찢겨 바다를 표류하다 홀로 해변에 파선된 폐선(廢船)처럼 푸른 바다의 기억마저 상실해 버렸다. 폐선은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단 말인가. 다시 초록빛 항해의 꿈마저 꿀 수 없단 말인가.

6·25 전쟁 당시 종군 기자로 활약했던 한 기자가 흑인 병사를 취재했다. “지금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그 흑인 병사는 이렇게 말했다. “give me tomorrow!” “나에게 내일을 달라!” 그렇다. 우리에게 내일이 없다면 절망과 아쉬움, 패배와 굴욕의 상처로만 끝난다. 그러나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아니 내년이 있다. 내일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지난 한 해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새로운 미래를 꿈꿔야 한다. 총과 칼을 겨누는 전쟁이 아닌 꽃과 손수건을 내미는 사랑을 해야 한다. 기득권을 쟁취하려고 서로를 밟고 죽이는 권모술수와 모사가 아닌, 먼저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 서로를 섬기는 진실한 희생이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는 2011년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2012년의 새로운 희망의 아리아를 부를 수 있다.

한 해가 저문다. 아니 새해가 다가오고 있다. 더 이상 서로 싸우고 죽이는 전쟁을 멈추어야 한다. 혼돈과 공허의 폐허를 빠져 나와야 한다. 증오와 음모의 비극적 악순환을 그쳐야 한다. 서로를 죽이는 시기와 질투의 총과 칼을 내려놓고 어머니의 가슴으로 따뜻하게 안아주며 생명을 살려야 한다. 그럴 때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 아니, 2012년 새해의 진정한 아침이 밝아온다. 폐선도 다시 아리아를 부를 수 있는 새 아침, 그 아침에 다시 초록빛 항해의 꿈을 꾸며 희망의 돛을 올리자. 거친 파도너머 에메랄드빛 신대륙이 기다리고 있다. 함께 가자. 다 같이 가자. 꽃을 가슴에 안기며 눈물 젖은 손수건으로 서로의 상처 난 손을 묶고.

(용인 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