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43) 기독교와 사회변화 <4>신분타파

입력 2011-12-25 19:09


태생부터 ‘賤待’받던 백정들 주 안에서 ‘天待’

한국에 기독교가 소개된 후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신분계급의 타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전적으로 기독교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기독교의 정신과 가치가 남존여비 뿐 아니라 반상(班常)의 구별을 철폐하는데도 큰 영향을 끼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의 인간관과 평등사상은 사회 체제의 변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오랜 세월동안 한국사회에 고통의 굴레로 남아있던 신분과 계층 간에 벽이 무너지고 양반과 상민 사이에 가로 놓여 있던 차별의 장벽이 제거되기 시작했다. 그 일례가 백정 해방운동이었다. 백정은 이조 500년의 역사 속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천대받던 신분이었다.

노비나 종보다도, 창녀보다도 더 낮은 바닥 신분이었기에 ‘백정배(白丁輩)’라고 불렸다.

이들은 기와집에서 살 수 없었고 비단 옷을 입을 수 없었고, 가죽신을 착용할 수 없었다. 다른 이가 보는 앞에서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울 수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언제나 존댓말을 사용해야 했고, 길을 앞질러 가는 일도 금지되었다. 이들은 상투를 틀 수 없었고 망건을 두르는 일도 금지되었다. 장가를 들 때 말 대신 소를 타야 했고, 신부는 비녀를 꽂아 머리를 올리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상민들과는 떨어져 성밖의 일정지역이나 농촌의 외딴곳에 집단을 이루고 살아야 했다. 이처럼 백정의 신분은 비천한 것이었고 그 신분은 의복과 생활환경, 사회적 삶에서 구분, 노출되어 있었다. 이들은 500 년 동안 한국사회의 속죄양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기독교회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동등하게 지음 받은 존재라는 점을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에 따른 그리스도인들의 결단이 초기 기독교 간행물에 보고 된 바 있다. 그 일례가 황해도 금천의 범래감리교회 이연철의 경우이다. 부유한 인물로서 노비를 두고 있던 그는 다섯 명의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그 가족까지 속량하면서 “나가서 자유로이 살면서 주를 진실히 믿으라”고 권면했다고 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평등사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한 가지 사례가 경남 진주군 봉래정에 위치하고 있던 진주교회의 반상합동예배 사건이었다. 1905년 진주에 부임한 호주선교사 커를(Dr Hugh Currell)이 학교와 병원을 열고 전도한 결과 진주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로써 평민들만이 아니라 진주성 외곽에 있던 백정 사이에서도 신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반상 구별 때문에 별도의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던 중 커를은 안식년을 맞게 되었고, 1909년 3월말 부임한 리알(Rev D M Lyall) 선교사는 신분상의 차이 때문에 별도의 예배를 드린다는 점은 기독교 정신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1909년 5월 둘째 주일 백정들을 진주교회당으로 오게 하여 동석예배를 시도했다. 이날 백정들이 진주교회당으로 들어오자 4백여 명의 교인 중 3백여 명이 동석예배를 거부하고 퇴장하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날 저녁 2백여 명의 신자들은 교회당에 모여 선교사에게 항의하는 등 분쟁이 일어나 49일 동안 진통을 겪었다. 이 사건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한국사회에서, 그리고 기독교공동체에서 조차도 수용되기 어려운 현실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합동예배 사건은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창립된 형평(衡平)운동의 원인(遠因)이 된다.

이런 현실에서 기독교회는 한국사회의 신분차별 철폐를 위해 고투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무어(Samuel F Moore) 선교사였다. 한국이름 모삼율(毛三栗, 1846∼1906)로 알려진 그는 46세이던 1892년 9월 내한하였다. 서울에 거주하면서 백정들의 사회적 신분을 알게 된 그는 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근처인 곤당골에서 시작된 곤당골교회(후일 승동교회)를 중심으로 백정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1894년 백정 박성춘씨를 개종시킨 일에서부터 백정과 그 자녀를 위한 선교,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1895년에는 6명의 백정이 복음을 받아드렸다고 한다. 박성춘씨는 1895년에는 세례를 받았고 1911년 12월에는 한국 최초로 백정 출신의 장로가 되었다. 그의 아들 박서양(朴瑞陽)은 모삼율 선교사가 설립, 운영하던 곤당골 교회 부속 예수학당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후일 제중원에서 시작한 의학교육(후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을 받고 1908년 한국인 최초의 서양 의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후일 한국인으로 최초의 세브란스의전의 교수요원이 된다. 선교사들은 이런 일들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게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시위하고자 했다. 무어와 그 동료들의 협조로 신분의 자유를 누리게 되자 다른 직종으로 이직하는 백정의 수가 급증하였다. 그래서 1900년 당시 40여만 명으로 추정되던 백정의 수는 1920년대에는 3만3천여 명으로 감소되었다.

무어선교사는 백정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한편 1894년 갑오경장 당시 동료선교사인 에비슨(O. R. Avison)과 함께 구한말 정부에 백정들의 신분제한 철폐와 일반인들과의 동등한 공민권 보장을 탄원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조정에서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백정에 대한 복장 제한 철폐와 동등한 법적 권리를 선포하였다. 무어는 사재를 털어 포고문을 인쇄, 전국에 배부하고 백정들 스스로 자기의 권리를 찾아가도록 계몽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14년간 신분철폐를 위해 일했던 무어는 1906년 12월 22일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혔다. 묘비에는 모삼율(毛三栗)로 기재되어 있으나 본인은 소(牛)가 운다는 의미의 모(牟)씨 성을 사용한 모삼열(牟三悅)을 더 즐겨했다고 한다. 사람들을 그를 인목(仁牧)이라고 불렀고, 그의 집을 인의예지가(仁義禮智家)라고 불렀다. 마르타 헌틀리(M. Huntly)는 한국 기독교회의 백정 해방운동을 “세상을 뒤집어 놓은 사건”(turning the world upside down)이라고 평가했다.

<고신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