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 不在와 상실… 이윤학 시집 ‘나를 울렸다’
입력 2011-12-23 18:19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사랑담론은 ‘부재(absence)’라는 독특한 현상과 관계 맺는다. ‘부재’(헤어짐)는 사랑의 순간마다 끊임없이 존재한다. 사랑의 주체는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견뎌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부재는 어떤 의미에서 시적 담론을 창조하는 동력이 된다.
이윤학(46·사진)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나를 울렸다’(문학과지성사)는 부재와 상실로부터 건져 올린 섬세하고도 치명적인 언어 미학을 드러낸다. “올해도 열리지 않은 석류를 상상했지요/ 아주 오래전에 심은 것 같으나/ 몇 년 지나지 않은 석류나무 주위를 맴돌았지요// 어느 해 봄날에/ 그대와 내가 심어놓은 석류나무/ 꽃 필 무렵엔 오지 못하고/ 열매 익을 무렵에 찾아와 주위를 맴돌았지요// 콩새가 지저귀던 석류나무가지/ 내가 다가가자 콩새는 날아가고/ 벌어진 석류 안에/ 콩새가 지저귀던 소리/ 담겼으리라 믿었지요”(‘석류’ 전문)
석류는 헤어진 ‘그대’와 ‘나’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다. 하지만 석류는 ‘나’가 실제로 심은 것이 아니다. 상상의 힘으로 심어놓은 시적 대상이다. ‘석류’의 등장은 시인이 미학적으로 선택한 질료이지만 실재하는 석류보다 더 깊이 시인의 내면에 착근한다. 그러므로 ‘열리지 않는 석류’에서 ‘나뭇가지에 매달린 석류’로 이행되는 촉매는 부재하는 ‘그대’다. 부재하는 ‘그대’를 상상 속에서 소망하는 힘이 석류를 열리게 하고, 콩새를 지저귀게 하는 것이다.
이윤학의 시적 진정성은 이런 시에서 배가된다. “죽은 개를 트렁크에 싣고/ 겨울 들판에 나가 보았다// 고구마를 캐낸 밭두둑 위에 잔설이/ 고은 체로 쳐낸 떡고물을 길쭉하게 뿌려/ 올려놓은 풍경, 오래 묶인 것들은/ 풀린 줄도 모르고, 기가 죽어 곁눈질로/ 자신과 상관없는 풍경을 훑는다”(‘마른 풀’ 부분)
‘죽은 개’와 ‘겨울 들판’이라는 스산하고 쓸쓸한 풍경. 그 풍경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 소멸하기 직전의 ‘당신’이다. 아니, 우리 자신이다. 우리야말로 ‘오래 묶인’ 존재가 아니던가. 이윤학은 ‘상실과 부재’로 규정된 우리 시대의 상처를 비록 상상이지만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벌어진 석류 안에 콩새가 지저귄다’는 득의는 우리 시의 서정적 깊이를 더해 주기에 충분하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