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공자 복권 세계 패권국 도약 전략 아니다”… 공자 75대 맏손자 쿵샹카이에게 묻다

입력 2011-12-22 18:08


공자(BC 551∼479)는 20세기 중국에서 오랫동안 비판의 대상이었다. 신문화운동(1912년) 이후 공자사상은 철폐돼야 할 구시대 유산으로 격하됐다. 아편전쟁(1840∼1842) 이후 서구 열강의 침략에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린 중국 왕조를 떠받들었던 지배 이데올로기가 공자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공자 탄압의 절정은 1966년부터 10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이었다. 당시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1893∼1976)은 “공자가 죽어야 중국이 산다”고 외쳤다. 마오의 발언으로 공자는 진시황의 분서갱유(BC 212) 이후 가장 심한 공격을 받았다. 공자를 기리는 사당은 파괴됐으며, 공자 후손들은 숨어 지냈다.

그런 공자가 중국에서 부활하고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 공자와 제자 3000명이 행진하는 퍼포먼스가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졌다. 올 초에는 공자를 그토록 억압했던 마오의 초상화가 내려다 보이는 천안문 광장에 대형 공자상이 세워졌다. 중국 정부가 2004년부터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전 세계 99개국 313개 대학 등에 설치한 기관의 공식 이름은 ‘공자학원’이다. 공자는 완벽하게 복권됐다.

공자의 75대 적장손(맏손자) 쿵샹카이(73)는 시조할아버지인 공자의 부침을 온 몸으로 겪은 인물이다. 그는 6세 때인 1944년 적장손으로 지명되면서 봉사관이라는 벼슬을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공자사상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던 중국인민공화국 정부가 1949년 수립되면서 시련이 닥쳤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30년간 허베이 지역 광산에서 일하며 객지를 떠돌았다.

1990년대 들어 공자 붐이 일자 그는 졸지에 귀빈 대접을 받으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취저우시는 그를 정치협상위원회 부주석 자리에 앉혔다. 시는 공자 어록을 도시 곳곳에 새기고, 공자 스토리로 거리를 장식하는 등 대대적인 공자 마케팅에 나섰다. 쿵샹카이는 어디를 가나 환대받았으며 공자의 혈통을 잇는 적장손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중국 아닌 외국을 여행한 경험이라곤 거의 없었던 쿵샹카이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가 공자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충남대에서 주는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지난 6일 방한하자 정부와 학계에서는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닷새간의 방한기간 중 설동근 교육과학기술부 차관, 오연천 서울대 총장, 서정돈 성균관대 이사장 등을 잇달아 만나 환담했으며 한국의 공씨 문중 인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풀기도 했다.

그가 귀국하기 전날인 지난 9일 서울시내 어느 한식당에서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한국 방문의 소감을 묻자 그는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는 논어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사람들이 모두 예의가 밝다”고 말했다. 공자는 논어 옹야(雍也)편에서 ‘바탕이 꾸밈보다 강하면 거칠게 되고, 꾸밈이 바탕보다 강하면 간사해진다. 군자는 이 두 가지를 조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문질빈빈은 ‘겉모양의 아름다움과 속내가 서로 잘 어울린다’는 뜻으로 쓰인다.

-중국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수십년 동안 탄압받아온 공자사상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중국 역사상 천하를 얻기 위해 서로 싸울 때는 공자를 비판합니다. 그러나 천하를 얻고 난 뒤 나라를 경영할 때에는 공자를 찬양합니다. 중국 역사상 여러 왕들이 공자를 존중한 것은 나름대로 까닭이 있었습니다. 공자는 평화로운 인간관계,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역설했습니다. 공자사상 전체를 놓고 보면 공자는 어떻게 우리가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될 때에는 (중국 정부가) 다른 일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사회 안정을 회복하려면 경제 건설도 해야 하고 전쟁이 남긴 상처를 보듬는 일도 처리해야 했습니다.

공자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교육가입니다. 이 사상은 중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중국인들은 공자사상을 잊어버릴 수가 없지요. 중국의 경제발전 속도가 빠릅니다. 국가와 정부는 요즘 사회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느냐를 심사숙고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떻게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가느냐가 중국 사회 발전의 중요한 관건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공자사상의 부활을 중국이 세계 패권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소프트파워 전략의 일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하버드대 조지프 나이 교수는 국제 전략에서 군사나 경제 등 하드파워가 아닌 문화와 사상 등 소프트파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공자사상이 중화우월주의를 부추기고 나아가 극단적 민족주의로 흐르면서 주변국과 마찰을 빚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위대한 민족은 반드시 자기 민족의 고대사상문화를 대표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중화민족은 위대한 공자가 있습니다. 공자사상을 전승하고 널리 알리는 일은 비난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공자사상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화(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나라들이 평화공존하고 모든 민족이 평등하게 지내는 대동(大同)세계의 구현입니다.

오늘날 중국은 경제적 번영을 향한 첫 단계에 진입해 있습니다. 경제적 번영은 반드시 자기 민족의 훌륭한 전통사상의 부활을 동반합니다. 저는 세계 각국이 모두 번영하기를 바랍니다. 세계 각국도 중국이 발전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덕이 외롭지 않은지라 반드시 이웃이 있다”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중국이 발전하면 공자가 주창한 정치도덕에 따라 반드시 우리들은 서로 좋은 이웃이 되어 화목하게 지내게 될 것입니다.

-공자사상이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유효합니까.

“공자는 어떻게 우리가 인간답게 살아야 하느냐를 가르쳤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자사상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 간 우애를 지키고, 친구를 사귈 때 진정성을 가져야 하고, 끊임없이 수양을 쌓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이치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소중한 기본 이치입니다. 일부 국가 경영의 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논어는 읽으면 읽을수록 독자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기쁘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아니하면 군자가 아니겠는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논어 첫 머리(학이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입니다. 한국 사람들도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어록 한두 개는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EBS의 인기 강좌가 논어였고 한국 최고 기업인 삼성전자의 이건희 회장이 아버지 이병철로부터 물려받은 책 한 권이 논어였습니다. 현대인이 논어를 올바로 배우고 지혜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논어가 논리성이 강한 책은 아닙니다. 아무 때고 책의 어느 한 부분을 읽어보다가 내려놓아도 괜찮습니다. 논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강좌를 듣고 해설서를 읽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무엇보다 논어 원전을 읽고 독자 자신이 터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정돈 성균관대 이사장을 만나 선물로 논어를 한 권 선물하면서 책 표지 안쪽에 제가 좋아하는 공자 말씀 여섯 글자(不遷怒 不貳過)를 썼습니다. 불천노(不遷怒)는 자신의 노여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불이과(不貳過)는 똑같은 과오를 두 번 범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공자가 제자 안회를 평가하면서 한 말씀입니다. (안회가 젊은 나이에 죽자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라고 슬퍼하며 ‘안회는 화를 내는 일이 없었으며 같은 허물을 두번 짓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 이사장은 자신도 하루 일을 마치고 나면 언제나 이 글귀를 떠올리며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살면서 화가 나거나 불쾌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 문제나 부모의 건강을 염려하기도 하고, 직장의 일들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으면 기분이 안 좋아집니다. 그렇더라도 공자는 자신의 노여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논어는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내년이 한·중수교 20주년입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양국 관계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한·중 관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시켜나가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합니까.

“저는 외교관이나 정치인이 아닙니다. 정치적 발언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문화적인 면만 말씀드리자면 한국과 중국, 두 나라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그중 하나는 청소년 교육 문제입니다. 이전 세대에 비해 풍족한 환경에서 자란 청소년들은 어려운 환경에 처해본 경험이 없습니다. 국가와 나 자신에 대한 책임감이 부족합니다. 청소년 교육 문제는 한국도, 중국도 공통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한 해법이나 경험을 함께 모색하고 공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양국 관계에서 정치나 경제도 중요하지만 교육이나 문화 교류도 중요합니다. 중국 옛말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한 동네에 사는 개와 닭은 죽을 때까지 서로 내왕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웃간에 살면서 왕래가 없다면 좋은 이웃이 아닙니다. 서로 왕래를 해야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불필요한 오해를 없앨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유사한 임무를 갖고 왔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취저우시와 (충남대가 있는) 대전시가 우호합작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타진해 보라는 부탁을 취저우 시장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두 도시의 고등학교 간 자매결연도 추진하려고 합니다. 또 한국의 성균관대로부터 유학대학원생 20∼30명이 내년 5월 취저우를 방문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방한 중 한국의 공씨 후손들을 만났는데 소감이 어땠습니까.

“한국에서 공자 후예들을 만나보니 중국에서 공자 후예들을 만난 것보다 기뻤습니다. 우리는 서로 이해관계로 만난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 많은 술을 마셨습니다. 처음에는 맥주를 마시다가 나중에 흰 술(중국술)을 마셨습니다. 술자리에서 지인을 만나면 천 잔을 마셔도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많이 마셨습니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했지만 시와 소설을 쓰고 합창곡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공자의 후손답게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데 이는 타고난 재능 탓입니까, 의식적인 훈련의 결과입니까.

“공자의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공자님은 왜 그렇게 많은 재능을 갖고 있습니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어려서 힘들게 자라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사회 밑바닥에서 많은 걸 겪었다. 나의 재능을 키운 것은 많은 노력 탓이었다.’ 저는 감히 공자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학교를 다닐 때나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예술인, 문학인들과 교제를 꾸준히 하면서 배움의 노력을 끊지 않았습니다.”

전석운 기자 swc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