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귤 보다 키위·망고·용과·구아바·아떼모야… 아열대 제주도, 맛이 바뀐다
입력 2011-12-22 18:06
아열대 과일과 함께 익는 제주도 富農의 꿈
따뜻했다. 온난화 영향으로 제주에는 더 이상 겨울이 없는 것 같았다. 출장 당일인 19일 서울의 아침 기온은 영하 5도. 반면 제주는 이날 아침 영상 7도였고 낮 최고기온은 13도까지 올라갔다.
제주는 더 이상 온대가 아니라 사실상 아열대 지역에 속한다는 주장은 과장이 아니다. 미국의 지리학자 글렌 트레와다의 구분법에 따르면 평균 기온이 10도가 넘는 달이 1년 중 8개월 이상일 경우 아열대 기후로 정의된다. 제주도는 4월부터 11월까지 평균 기온이 10도를 상회한다(제주 외에도 전남 목포와 경남 통영 등이 아열대 기후 기준을 충족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주에는 키위를 비롯해 망고, 용과, 구아바, 아떼모야 등 아열대 과일을 재배할 수 있는 여건이 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제주산 감귤과 미국산 오렌지가 무한 경쟁을 펼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열대 과일을 재배하는 농가가 제주에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01년 297농가, 195.6㏊였던 아열대 과일 재배 면적은 2010년 569농가, 302㏊로 각각 92%, 54% 늘었다. 제주농업기술원도 아열대 과일이 감귤을 대체할 소득원으로 보고 육성 방안을 마련 중이다.
바나나와 파인애플의 실패를 피하라
서귀포시 위미리의 한 비닐하우스 농장. 하우스 안으로 들어서자 후덥지근했다. 바깥과의 기온차로 기자가 쓴 안경에 곧바로 김이 서렸다. 실내 기온은 영상 23도였다. 제주열대과수연구회 회장인 김홍숙(59)씨는 농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과일나무에 물을 주고 있었다. 1980㎡(약 60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에서 김씨가 애지중지 키우는 것은 이름도 생소한 아떼모야와 용과.
1870년 호주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아떼모야는 어른 주먹보다 큰 크기로 무게는 평균 500g 내외다. 돌기 모양의 과피가 과육을 둘러싸고 있어 외관상으로는 별로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아떼모야의 당도(糖度)는 과일 배보다 배 가까이 높다. 배의 당도가 보통 11∼12브릭스(물 100g 속에 설탕이 몇 g 들었는지를 나타내는 농도)인데 반해 아떼모야의 당도는 17∼20브릭스에 달한다. 아떼모야의 과육 속 철분은 감귤보다 무려 5배나 많다. 아떼모야는 대형마트나 백화점에서 ㎏당 2만∼4만원의 고가에 팔리는데도 소비자들로부터 인기가 높다.
하우스 속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를 헤치고 가지를 살펴보니 둥그런 아떼모야가 달려 있었다. 김씨는 “아떼모야는 온도에 민감한데 올 봄에는 갑작스러운 이상 냉해로 열매가 많이 열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떼모야 나무 옆에는 가시 달린 줄기가 아래로 축 늘어진 선인장 같은 것이 보였다. 중앙아메리카 아열대 지역이 원산지인 용과 나무가 2m 간격으로 들어차 있었다. 열매가 열리는 줄기 주변에 가시가 많이 보였다. 김씨 손에도 가시에 찔린 자국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용과는 높은 당도에 울긋불긋한 색깔이 보기 좋게 식감을 자극하기 때문에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다. 김씨는 “아떼모야나 용과는 기르는데 손이 많이 가서 감귤에 비해 힘들지만 수입은 괜찮다”고 전했다.
김씨가 이들 아열대 과일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진 것은 2001년. 하우스 감귤을 20년간 키웠던 그는 감귤 값이 생산비에도 못 미치게 떨어지고 감귤농가 사이의 경쟁도 격화되자 아열대 과일을 키우기로 결심했다.
품종을 고르기 위해 그가 가장 먼저 고려한 것은 직수입 가능성. 제주에서는 한때 고수입 작물로 바나나와 파인애플 재배가 유행이었다. 하지만 1991년 수입 자유화에 따라 동남아산 바나나와 파인애플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빚더미에 올라앉는 농가가 속출했다.
김씨는 아떼모야와 용과가 바나나와는 달리 직수입하기 힘든 과일이라고 결론내리고 본격적으로 키웠다. 2009년 3월 그는 마침내 본격적인 생산에 성공했다. 아열대 과일을 기르려고 생각한 지 8년 만이다. 김씨는 현재 연간 1억원이 넘는 수익을 올리고 있다. 김씨에게 동조한 이들도 늘어서 지금은 13가구의 농가가 아떼모야를 재배하고 있다.
독자브랜드를 키워라
공항에서 차로 10여분 거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제주시 도련동의 한 창고에서 5, 6명의 인부가 키위를 부지런히 5㎏ 박스에 담고 있었다. 창고 옆에는 990㎡(약300평) 규모의 키위농장이 있었고 키위나무에는 여전히 푸른 잎이 남아 있었다.
고봉주(53) 한라골드 영농조합법인 대표는 자신의 농장에서 10월부터 11월 말까지 수확한 키위를 포장하고 있었다. 그는 1985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감귤 대신 키위를 재배한 농부다.
키위는 다른 아열대 과일과 달리 비닐하우스 속이 아닌 노지(露地·지붕 따위로 덮거나 가리지 않은 땅) 재배도 가능해 최근 제주 지역에서 재배면적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2001년 165.6㏊였던 재배면적이 2010년 260.7㏊까지 증가했다.
하지만 국내 시장은 뉴질랜드산 키위 브랜드인 ‘제스프리’가 56.9%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다. 작물 재배의 특성상 5월부터 그 다음해 1월까지는 뉴질랜드산이 시장을 휩쓴다. 12월부터는 국산 키위들이 시장에 나오지만 여전히 ‘제스프리’에 밀리고 있다. 이 시기에 팔리는 ‘제스프리’는 사실 뉴질랜드가 아닌 제주에서 재배된 것들이다. 제스프리가 2007년 1월 제주의 일부 농가와 계약하고 생산자주문방식(OEM)으로 납품 받아 판매하면서 사실상 1년 내내 한국 키위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이들 주문자 생산방식의 농가는 총생산액의 15%를 로열티로 지급한다. 토종 브랜드들은 품질에서 대등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시장에서는 해외 브랜드에 밀리는 게 현실이다.
이러다 보니 제스프리가 국내에서의 지위를 이용해 횡포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다. 대형마트에서 제스프리보다 가격이 싼 칠레산 키위를 판매하지 못하도록 방해해 지난달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 4억2700만원을 부과 받은 게 대표적인 사례다.
문제는 칠레산 키위뿐만 아니라 국내산 키위 역시 제스프리의 집중 견제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국산 키위는 그동안 뉴질랜드산에 비해 품질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한라골드’ ‘제시골드’ 같은 독자적인 품종을 개발해 경쟁력을 갖춰가고 있다.
그러나 해외 거대 기업과 국내 영세농들이 대등하게 경쟁하기는 힘든 노릇. 고 대표는 2008년 3월 동료 10명과 함께 제스프리에 맞선 독자 브랜드 ‘키위랑’을 만들고 영농법인을 설립했다. 농가들이 재배 기법을 공유하고 공동 창고를 사용해 유통비용을 줄이는 등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고 대표는 “제스프리에 납품하는 농가는 홍보 마케팅 비용을 따로 들이지 않고도 생산 물량을 편하게 팔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우리의 경우 유통비용이 추가로 들긴 하지만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이익 규모가 더 크다는 장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고 대표는 법인 규모를 확대해 4∼5년 후에는 영농법인에 참여하는 회원 수를 40명까지 늘리고 매출액도 현재 15억원에서 100억원까지 키우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이날 서울 양재동 농협 하나로마트 등 대형마트에서 판매할 키위 1000박스, 5t 분량(1500만원어치)을 출하했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제주에서 아열대 작물이 재배된 게 최근 일은 아니다. 이미 1970년대부터 바나나와 파인애플 등이 재배됐다. 최근에는 키위와 망고, 아보카도 등이 작은 면적에서 다양하게 재배되고 있다.
이들 아열대 과일은 감귤로 한정되다시피 한 농가 소득원을 다각화시키는 장점이 있다. 특히 제주 지역의 기온이 지난 70년간 평균 1.5도 상승한 탓에 하우스 시설만 갖춘다면 고소득이 가능한 재배 환경이 마련됐다.
제주농업기술원도 아열대 과일 재배 면적을 늘리도록 농가를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기술원 내 아열대 과일 시범재배 비닐하우스에서 리치, 망고스틴, 인디안주주베 등 새로운 아열대 과일도 시범 재배하고 있다.
고성준 제주농업기술원장은 “제주 지역의 기후가 차츰 변하면서 아열대 작물을 도입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며 “키위나 망고 품종에서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하는 만큼 리치 등 다른 품종도 경제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재배를 원하는 농가에 기술을 적극 이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열대 과일 재배에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키위를 제외한 나머지 과일은 대부분 비닐하우스 내에 난방시설이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초기 시설비 부담이 크다. 아열대 과일 재배를 위한 시설비는 보통 3.3㎡(1평) 당 15만원이 들어간다. 묘목 비용은 그루 당 3만원으로 비싼 편이다. 나무를 심는다고 곧바로 열매를 수확하는 게 아니라 최소 3년이 지나야 결실을 맺는다. 투자비용 회수에 시간이 걸리는 것도 단점이다.
하우스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름값도 만만치 않다. 국제 유가가 급등하면 농부들의 마음은 철렁한다. 제주도는 특유의 화산지형에서 나오는 지열을 이용한 난방으로 기름값을 절약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서귀포 인근 화순지역의 경우 화순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을 활용해 난방에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아열대 과일에 대한 연구 기술이 초보 단계인 점 또한 부담이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아열대 과일 도입에 앞서 병해충 관련 연구를 86∼90% 달성하는 것과 달리 우리는 겨우 40% 정도만 해놓는 실정. 이 때문에 아열대 과일을 들여오고 나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돌림병이라도 유행하면 엄청난 피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겁부터 낼 필요는 없다. 리스크가 있는 만큼 고소득의 기회도 있다. 어차피 우리 농가들이 FTA에 따른 경쟁에 대비해야 한다. 김홍숙 회장은 “재배 초기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남보다 앞서 돈을 벌고 싶어 도전했다. 나는 재배 기법을 배우기 위해 대만을 여섯 번이나 다녀왔다. 준비를 철저히 하면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제주·서귀포=글 이제훈 기자, 사진 강민석 선임기자 parti98@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