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제비들과 함께 계시는 장군님… “나는 김정일의 선전화 일꾼이었다”
입력 2011-12-22 20:16
두만강 지류(支流)의 물살은 예상보다 너무 셌다. 장마철 홍수로 평소 허리쯤이던 수면이 가슴팍까지 차오른 데다 워낙 급류가 돼서 앞으로 나아가기가 몹시 힘들었다. 날까지 저물어 사방이 캄캄한 가운데 ‘쏴’하는 물소리만 요란했다.
2000년 8월 함경북도 회령의 중국 접경지역. 아버지와 나는 저녁 8시30분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북한 경비대 초소의 동태를 살피며 조심조심 강가로 숨어들었다. 둘 다 옷을 모두 벗은 뒤 끈을 만들어 한쪽 끝은 내가 잡고 반대 쪽 끝은 아버지가 틀어쥐었다. 맹렬하게 쏟아져 내려오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끈 절대 놓치지 마세요.” “응. 알았다.”
내가 앞장서 첨벙첨벙 걸음을 옮기다가 헤엄치다 하면서 조금씩 나아갔다. 코와 입으로 물이 정신없이 들어왔다. 떠내려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며 강폭 중간쯤 왔을 때, 끈을 쥔 손의 느낌이 문득 가벼웠다. 잡아당기자 끈은 힘없이 끌려왔다. 순간 몸에 전기가 온 듯 부르르 떨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어두워 흐릿한 가운데 10m쯤 뒤로 아버지가 떠내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아버지, 아버지….”
눈에서 멀어져 가는 윤곽을 좇아 미친 듯이 헤엄쳤다. 그러나 그 윤곽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를 잃었다. 사방이 캄캄한 가운데 ‘쏴’하는 물소리만 요란했다.
나는 김정일 선전화 일꾼이었다
송벽(42) 작가는 화단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몇 되지 않는 탈북자 출신이다. 그는 북에서 아버지를 익사(溺死)로, 어머니와 여동생을 아사(餓死)로 잃는 처절한 경험을 했다.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하다 화가에게 생명 같은 오른손 검지까지 잃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남한에서 독자적 작풍의 화가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내년 2월에 미국에서 개인전도 열 예정이다. 중견 화가도 기회를 잡기 어려운 해외 개인전을, 등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탈북 화가가 가진다는 건 주목할 만한 일이다. 서울 일원동 개인 작업실에서 20일 그를 만났다. 송 작가는 우선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찬양하는 선전화(포스터의 북한말) 일꾼이었던 시절을 회상했다. 거의 서울 말씨였지만 간간이 ‘기래(그래)’ ‘∼디요(지요)’ 등의 북한 말투가 섞여 있었다.
“황해도의 한 공장에서 일했는데, 평소에 그림을 잘 그린다고 소문이 나서 조선노동당 비서들한테 발탁됐어요. 그래서 당 선전부에서 포스터를 그리게 됐죠. 나 같은 일반 노동자가 선전화 일꾼으로 발탁된다는 건 최고의 긍지였습니다. 7년이나 그 일을 했죠.”
그는 당을 선전하고 주민들을 선동하는 포스터들을 밤을 새워가며 그렸다. ‘김정일 장군님을 위한 총탄이 되자!’ ‘조선인민의 모든 승리의 조직자이며 향도자인 김정일 동지 만세!’등의 문구를 담은 그의 선전화가 거리 곳곳에 나붙곤 했다. 그러나 형편은 몹시 궁핍했다. 선전화 일꾼이라고 노임이나 배급을 다른 인민들보다 더 받는 건 아니었다. 일가족이 하루 먹을 쌀도 없어 굶기를 예사로 했다. ‘고난의 행군’을 더 이상 해나가기 어렵던 어느 날, 아버지가 식량을 구하러 가자고 했다. 어머니와 여동생 둘을 남기고 두 사람은 길을 나섰다. 그래서 중국에 사는 친척에게서 쌀과 옷가지 등을 얻어오려고 회룡에서 두만강을 건너다 아버지가 그만 목숨을 잃은 것이다.
“아버지가 며칠간 배를 쫄쫄 굶어서 하도 기운이 없어 끈을 놓친 것 같아요. 물살에 떠내려가는 걸 보고 정신없이 헤엄치다 강가를 보니 북한 경비대 군인들이 손전등을 켜고 다니는 게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군인들한테 가서 ‘우리 아버지가 빠졌는데 구해 달라. 시체라도 건져 달라’고 통사정했어요. 하지만 군인들은 ‘강 건너려던 역적이네. 이 새끼 넌 왜 살아나왔어?’라고 소리 지르며 마구 매를 때렸습니다. 그래도 울고불고 사정하다 총 개머리판에 맞고 기절했지요.”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그리고 손가락을 잃다
그는 함경북도 청진에 있는 구류장(강제수용소)에 감금됐다.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러면서 난생 처음으로 북한 체제에 대한 회의에 빠졌다. 그는 당초 가족이 있고 고향이 있는 북한 땅을 탈출하겠다는 계획은 전혀 없었다. 단지 식량을 구한 뒤 집으로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잃고 구류장에서 혹독한 구타와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 북한 사회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 다른 땅에서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생각이 커져 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들 모습 아시죠? 딱 그 몰골이었어요. 못 먹고 매 맞고 노동에 시달려서 뼈만 앙상했죠. 손가락도 하나 잃었습니다. 겨울에 산에서 장갑도 없이 나무 해오는 일을 하다 오른손 검지에 큰 가시가 박혔어요. 가시는 뽑았는데 며칠 뒤부터 고름이 나오더니 썩어가더라고요.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두 마디를 잘라내야 했습니다. 결국 쓰러져서 일도 못 나가고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렸죠. 그런데 시체 치우기가 귀찮았는지, 구류장 책임자가 ‘너 지금 내보내면 집까지 갈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죽더라도 집에 가서 죽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구류장을 나와 구걸을 해가며 천신만고 끝에 외삼촌 집에 당도했다. 거기서 몸을 추스른 뒤 북한 땅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계신 집으로 찾아가 새벽에 눈물의 상봉을 했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얘기는 차마 못 하고 “중국에 먼저 가 계시다. 나도 따라 들어가야 하니까, 소식 보낼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가지 말라고 붙들고 울다가 결국 아들을 떠나보냈다. 송 작가보다 두 살 아래인 첫째 여동생은 이미 굶어죽은 상황이었고, 나무를 해서 장작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어머니도 몇 년 뒤 끝내 굶어죽게 된다(송 작가는 남한에 들어온 뒤 어머니 사망 소식을 들었다).
2001년 6월, 그는 다시 두만강 강가에 섰다. 지난번과 달리 혼자였다. ‘이번에 잡히면 죽자’ 하는 생각에 목에 쥐약 주머니를 찼다.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다고 그물을 들고 있는 아이들 틈에 섞여서 함께 고기를 잡는 체하다 물밑으로 잠수했다. 30m쯤 되는 강폭을 건너 마침내 중국 땅에 올랐다. 우여곡절 끝에 한인 교회를 찾아갔고, 그분들 덕에 2002년 1월 대한민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여기까지 나를 인도해줬구나.’
남한 땅에서 꽃 피운 미술의 꿈
한국에 들어왔을 때 송벽의 나이는 서른넷이었다. 새로운 세상에서의 삶과 생계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다 타고난 재주인 미술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간절함에 공주사범대 미술교육학과에 03학번 새내기로 입학했다. 등록금은 정부에서 지원해줬지만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건설공사장에 나가 막노동을 하거나 횟집에서 그릇을 닦았다. ‘큰물에서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어서’ 2007년 졸업과 함께 홍익대 대학원 동양화과에 입학했다.
대학원 시절부터 본격적인 작품 창작에 나섰다. 애초에 ‘표현의 자유’라는 걸 몰랐던 북한에서의 선전화 일꾼 시절을 생각하면 꿈만 같았다. 그러나 동양화가로서 산수와 풍광만을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미술학도와 달리 북한 사회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싶었다. 북한 사람들이 얼마나 배고픔에 시달리고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고 있는지 그림을 통해 알리는 걸 송벽이라는 예술가의 사명으로 삼기로 했다. 마침내 올 1월 첫 개인 전시회를 서울 관훈동 ‘갤러리 가이아’에서 개최했다. 그의 논문을 지도한 홍대 동양화과 한진만 교수가 “작품이 좋으니 내가 알아보겠다”며 전시 공간을 잡아줬다.
“막노동 뛰면서 학비 마련하고 작품 준비하느라 참 고생했는데 한 교수님이 큰 도움을 주셨어요. 그래도 개인전을 열려고 하니 또 돈이 부족해 이삿짐센터에서 일당 5만원을 받으며 1주일 일하고, 밥 대신 컵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그래도 돈이 모자라 전시회 팸플릿 250만원어치를 외상으로 인쇄하는 바람에 ‘빚을 크게 지는 구나’ 하고 걱정이 많았죠.”
하지만 전시회가 막상 시작되자 고민은 모두 해결됐다. 탈북화가가 본격적으로 북한 사회를 그려냈다는 특수성 때문에 국내 언론은 물론 미국과 프랑스, 일본, 캐나다, 폴란드 등 해외 언론사 기자들까지 찾아와 그를 인터뷰했다. 전시회는 당초 1주일 일정에서 2주일로 연장됐고 갤러리 1개 층만 예약했던 게 3개 층을 모두 쓰는 걸로 확대됐다.
그의 작품에는 북한의 다양한 모습이 담겼다. 특히 미국 영화배우 메릴린 먼로(1926∼1962)가 통풍구 위에서 바람에 휘날리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있는 유명한 포즈(1955년작 영화 ‘7년만의 외출’의 한 장면)를 패러디한 작품이 눈길을 모았다. 송 작가는 메릴린 먼로 얼굴 대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얼굴을 그려 넣었고, ‘벗어라’라는 제목을 달았다. 김 위원장에게 북한의 개방을 촉구하는 풍자화였다. 몇몇 작품은 판매까지 돼 송 작가는 팸플릿 외상값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김정일 사망, 그리고 미국 개인전
기자가 송 작가를 만난 것은 김 위원장 사망 소식이 전해진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는 다소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죽음은 필연이죠. 김일성 수령도 제가 북한에 있을 때 영원한 태양으로 마음속 깊이 모시겠다고 충성을 다했었는데…. 김 위원장이 잘 죽었다, 못 죽었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요.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국민들에게 배고픈 설움은 주지 말아야 하는데, 그 점에서 김 위원장의 죽음을 참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는 내년 2월 미국에서 개인전을 연다. 그의 작품세계에 매료된 국내외 인사들이 도와줘 애틀랜타 전시회는 확정됐고, 워싱턴 전시회는 추진 중이다. 이미 완성한 작품 중에는 ‘꽃제비들과 함께 계시는 장군님’이라는 풍자화가 있다. 식량난으로 굶어죽기 일쑤인 북한의 ‘꽃제비’ 아이들을 김 위원장이 끌어안고 함께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다. 송 작가 역시 꽃제비 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데, 현실에서 볼 수 없었던 김 위원장의 ‘따뜻한 마음’을 그려 보임으로써 역설적으로 북한 정권을 비판하고 있다.
김 위원장이 죽었는데, 그를 소재로 한 작품을 계속 그릴 거냐고 물었다.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요. 저도 좀 당황스러워서(웃음). 그러나 북한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한국에 와서 자유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삼겹살을 얼마나 쉽게 먹을 수 있는지도. 아, 배고픈 설움…. 그건 겪어봐야 알죠. 북한 정부가 세계의 흐름에 발을 맞추길 바랍니다. 언제까지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처럼 지구에서 고립된 채 살아갈 겁니까? 북한 국민들이 최소한의 자유를 누리고 배고픔의 설움에서 벗어나길 기원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예술가로서 이 길을 걸어가는 걸 제 운명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글=김호경 기자,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