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선교 100년] (15) 中 산둥성 핑두 구셴교회와 라이양 장관자이교회

입력 2011-12-22 18:59


산둥성 곳곳 씨 뿌린 교회에 ‘조선식 부흥 유전자’ 전수

기자는 산둥(山東)성을 취재하면서 초기 한인 선교사들의 사역지가 매우 넓었다는 데 놀랐다. 라이양(萊陽)성 사방 7.5㎞(30리)로 제한됐던 선교지는 라이양현을 중심으로 지모(卽墨)현 핑두(平度)현 하이(海陽)현 등 6개 현으로 늘어났다. 방효원 선교사의 기록인 1937년 게자씨 제68호 ‘산둥선교에 대하여’에 따르면 한인 선교사들의 활동지역은 남북 거리가 109.1㎞(278리), 동서 간 거리가 100.5㎞(256리)에 370만∼380만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광활한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선교사들은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을 순회하며 사역해야 했다. 이번 주부터 2회에 걸쳐 홍승한 박상순 목사가 사역했던 핑두 구셴(古峴)과 라이양 장관자이(張官寨) 상황을 소개한다.

홍승한 목사가 개척한 구셴교회

취재팀의 원래 계획은 초기 선교사들이 활동했던 모든 지역을 방문해 최대한 사역 흔적을 찾는 것이었다. 라이양 지모 칭다오(靑島) 등지에서는 예상치 못한 사람들을 만나거나 1910∼50년대 한인 선교사들과 관련된 교회와 옛 사택 등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는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홍승한 목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다가 방문한 구셴과 장관자이였다. 취재팀이 구셴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옛 구셴교회에 대해 들은 바가 전혀 없다”고 했다. 선교사들과는 직접적 관계는 없지만 구셴과 장관자이에 기독인들이 있다는 얘기에 만족해야만 했다.

1920년대 구셴에는 홍 목사와 중국인 남전도인이 개척한 교회가 있었다. 구셴교회는 자오둥(膠東)노회에 포함돼 있다가 1933년 라이양노회가 성립되면서 라이양노회에 소속됐다. 이 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자립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자력으로 예배당까지 건축하게 됐다. 홍 목사가 구셴에서 활동한 최초의 선교사는 아니었다. 미국 남침례회(南浸信會) 화북(華北)구에 소속된 선교부 가운데 하나인 핑두 선교부가 1885년 설치돼 핑두에서 활동했었다. 대표적인 선교사가 로티 문(본명 샬롯 딕스문)이었다. 중국의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여성 선교사 로티 문은 지역사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설립했고 1889년에는 침례교 목사를 초빙해 첫 번째 침례를 베풀었다고 전해진다.

홍 목사의 개척방식은 처음엔 복음당을 세우고 전도에 열중하는 것이었다. 김교철 인천기독교역사연구소장은 “1935년 11월 신학지남에 실린 박상순 선교사의 글 ‘산둥선교의 과거와 현재’를 보면 구셴에 복음당을 설립하고 전도한 시기를 1923년 6월로 기록했지만 구셴교회의 출발시기를 1920년 6∼8월쯤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근거로 1920년 10월에 보고된 ‘산둥성 선교회 총계표’(조선예수교장로회 제9회 총회 회의록)를 들었다. 당시 회의록을 보면 구셴지방 교회, 즉 복음당에 출석하는 교인은 2명이었고 1명의 중국인 남전도인이 시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교인 2명은 망우(望友) 즉 세례받기 이전 단계인 학습과정 중에 있는 새신자였다. 기존 신자가 없던 지역에서 수개월 전도해 2명이 복음당에 출석하게 되면서 교회의 기초를 놓기 시작한 것이다.

산둥에 파송된 한인 선교사들은 교회개척과 성장에 집중하면서 삼자원리에 입각한 토착자립교회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이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선교사는 직접 교회 개척에 참여하되 현지 전도인을 고용해 월봉을 지불하고, 선교비에 책정된 금액 가운데 복음당비를 사용해 복음당을 마련한 뒤 중국인 전도인을 그곳에서 사역하게 했다. 선교사는 봄과 가을 두 차례 순회하면서 성례를 거행하고 치리했다. 아울러 기회가 있는 대로 순례하면서 심방, 사경, 전도에 힘썼다. 복음당을 마련하고 전도하는 방식을 일명 좌당전도(座堂傳道)라고 한다. 일정한 장소, 즉 가옥을 임차해 걸상과 의자, 탁자, 등, 서화, 기타 전도에 필요한 약간의 가구 등을 설치하고 예배일과 시일(市日) 등에 예배의식을 거행하며 복음을 선포했다. 평일에는 개인을 심방하며 교제하고 전도했다. 김 소장은 따라서 구셴 복음당 설립에 드는 비용은 선교사(홍 목사)가 지원하고 현지 전도인의 월봉을 지원하면서 교회개척에 선교사가 참여하되 상주하지 않고 특별한 경우와 시기에만 방문해 동참했던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1917년 가을 방효원 목사와 함께 라이양에 온 홍 목사는 언어를 공부하면서 전도 및 라이양 난관(南關)교회 사역 등에 참여하다가 1919년 11월 이후 한인 선교사들의 선교구역이 확장되면서 소속됐던 산둥노회에서 자오둥노회로 이명하였고, 라이양 서쪽을 전도하게 됐다. 그는 라이양 서쪽지방 7개 지역을 담당하였고 그중 한 곳이 구셴이었다. 1921년 8월까지 라이양 서편지방 교회를 담당하다가 그해 11월 산둥과 자오둥노회 결의로 지모지역이 조선선교구역에 편입되면서 지모지역 개척을 위해 라이양 서쪽지방교회를 후배 선교사인 박상순 목사에게 맡겼다.

미국 북장로회로부터 이양받은 장관자이교회

구셴교회가 홍승한 목사가 직접 개척한 곳이라 한다면 라이양 서남쪽 장관자이교회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에 의해 설립, 목양되다가 1920년 6월 조선선교사회에 인계된 뒤 홍승한 박상순 방지일 목사가 연이어 활동하던 곳이다. 김 소장은 “1920년 장로 2명, 집사 2명에 달하고 세례교인이 95명으로 보고된 것을 볼 때 비교적 이른 시기에 교회가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인 선교사들은 소속된 교회 성도들에게 예배 출석뿐 아니라 연보를 내는 것을 강조했다. 홍 목사 등은 새로 맡게 된 지방교회를 순회하면서 주일연보가 없는 것을 보고 주일예배에서 연보를 드리는 게 마땅하다고 가르쳐 주일연보가 시작됐다. 미국 선교사들이 담당하던 시기에는 교회경상비와 중국전도인 사례비를 자급하지 못했었다. 한인 선교사들이 교회를 담당하면서 이전에 없던 주일밤예배와 삼일기도회도 시작됐다.

1920년쯤 장관자이교회는 성도 수 100명에 주일 평균예배 참석자가 65명이나 됐지만 단독 예배당이 없어서 교인의 집을 임차해 사용하고 있었다. 한인 선교사들은 교인의 책임에 대해 가르쳤고 조선교회처럼 자립하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목양했다. 그 결과 1922년 봄 장관자이교회 왕서산 장로가 수백원 가치가 되는 기지와 가옥 3칸을 연보하였고 이에 감동한 교인들이 연보해 와가(瓦家) 5칸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해 그해 5월 낙성하게 됐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1회 총회 회의록에 따르면 예배당 건축비로 350원이 소요됐다. 장관자이교회 교인들의 힘만으로 예배당을 건축했다는 좋은 선례를 남겼다. 1920년 9월에 낙성한 라이양 난관교회는 조선선교회의 일부 지원을 받아 세워졌고 지모의 쉔다오(宣道)교회는 조선교회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건축됐다. 장관자이교회는 건축 이후 1924년부터 33년까지 해마다 예배당을 수리하였고 재건축은 하지 않았다.

박 목사가 담당하던 시절 장관자이교회는 더욱 짜임새를 갖추게 됐다. 1920년 장로 2명이었다가 1921년부터 1923년 8월까지 장로 4명, 9월부터 1930년까지 장로 3명이 시무했다. 1931∼1933년 장로 2명이 시무하다가 1933∼1936년 장로가 3명으로 늘어났다. 장관자이교회에는 여전도인도 있었다. 1920∼1923년, 1924∼1927년이지만 구체적인 인물을 확인할 길은 없다. 1921년 1명의 남전도인이 활동하다 시무를 중단했다. 1927∼1930년, 1932∼1933년 또다시 남전도인이 활동하다가 시무를 중단했다. 조선선교회 보고에 따르면 각각 다른 시기에 시무했던 중국전도인들의 월봉은 조선선교회에서 지원했다. 1923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2회 총회 회의록을 보면 장관자이교회에는 집사 외에도 권찰제도가 있었는데 1923년 5명의 권찰을 택해 교인을 돌보며 교회를 살피게 했다.

핑두·라이양=글 함태경 기자, 사진 이동희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