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철휘 (19) ‘지뢰사고’ 故 정경화 대위, 참군인 표상으로 부활
입력 2011-12-21 17:20
중대장은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양팔과 다리는 다 골절된 상태여서 링거를 꽂을 곳이 없을 정도였다. 겨우 혈관이 연결된 오른쪽 발등 한 곳에만 간신히 링거를 꽂은 상태에서 국군춘천병원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중대장의 기도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화천에서 춘천까지의 비포장도로는 참으로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중간 중간 고통에 못 이겨 몸부림치는 중대장의 몸을 꼭 잡고 있었는데 가까스로 한군데 꽂아놓은 링거바늘마저 빠질 것 같아서였다. 병원에 도착하는 순간 중대장의 숨이 멎기 시작했다. 재빨리 응급실로 옮겨 여러 명의 군의관이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끝내 회생하지 못했다.
이것이 내가 본 최초의 죽음이었다. 머리가 멍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 이처럼 가까이 있는 것인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사단에서 같이 온 군의관은 환자를 내려놓고는 바로 돌아가 버리고 전방에서 온 촌 군인인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얼마 뒤 병원에서 안내해주는 대로 임시 빈소를 차린 그날 밤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 14:32) 나는 이 사건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국방부 인사제도 담당으로 보직되어 전임자에게 업무를 인계받는 중에 오래된 민원을 하나 만나게 되었다. ‘고(故) 정경화 대위의 추서진급건!’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민원 내용은 이랬다. “고 정 대위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그 비석 뒤에 새겨진 사망 경위가 ‘안전사고’로 순직했다고 돼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지뢰제거는 ‘작업’이 아니라 ‘작전’이었고 지뢰를 제거하는 순간도 병사들에게 시키지 않고 중대장이 직접 안전핀을 꽂다가 폭발한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닌 솔선수범의 표상이니 당연히 추서진급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민원인이 유가족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정 대위를 존경하는 그 당시 중대원들이 ‘맹호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끈질기게 민원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국방부는 “추서진급은 타의 귀감이 되는 내용으로 순직한 경우 사망 당시에만 해당되는 것이지 사망한 뒤 시간이 오래 지난 다음에는 진급시킨 전례가 없다”는 요지의 답변을 보내곤 했다. 나 역시 안타깝기는 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후 국회에서 추서진급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생겨나 정 대위의 사고도 재조사를 거쳐 소령으로 추서진급이 됐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내가 처음 본 죽음, 정 소령의 일을 내 손으로 마무리할 기회를 주셨으니 말이다. 맹호회와 유가족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순직 장소인 화천군 ‘경화동산’의 동상에는 계급장을 바꿔 다는 진급식도 거행했다고 한다. 맹호회 회원들의 정 소령에 대한 추억은 애틋하다. GOP에서 염소를 키워 생일을 맞은 병사에게 어머니를 생각하라며 양젖을 보내주는 중대장, 70년대에 벌써 군에서 무인 병영매점(PX)을 운용할 정도로 부하를 배려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가진 중대장, 사격을 잘 못하는 부하들에게 자신감을 부여하기 위해 영점 표적지를 자기 양다리 사이에 세워 놓고 쏘게 하는 담대한 중대장! ‘그때 그 자리’, ‘백암산 접동새’라는 진중문고는 정 소령을 추모하는 맹호회원들의 노래이다. ‘죽어도 살리라…’ 나는 장군이 되어서도 그분의 리더십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곤 했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