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사망] ‘사망 방관설’ 등 이번에도 또…
입력 2011-12-21 18:25
김일성 사망 당시에도 사인 놓고 각종 說 난무
독재국가는 폐쇄성을 특징으로 하고 음모정치가 횡행한다. 이런 이유로 독재자의 사인(死因)은 공식 발표와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전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라는 북한 지도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음모론적 해석이 나오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에도 음모론이 활발했다. 북한이 발표한 사망 시간은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 사망 장소는 묘향산초대소였다. 사인은 심근경색에 의한 심장마비. 당시 김 주석은 82세의 고령이었다. 사망 한 달 전인 6월에만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의 두 차례 정상회담을 포함해 17차례에 걸쳐 외부행사에 참석하는 등 과로가 겹쳐 사망했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사망 직후부터 자연사가 아니라 사고사 혹은 타살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여기에는 북핵문제를 북·미 양자회담과 남북 정상회담으로 처리하려는 태도에 북한 군부가 반발했다는 점, 김 주석이 정치 일선에 다시 복귀하려 해서 아들 김정일 위원장이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점 등이 배경으로 제시됐다. 지도자 사망에 외국의 조문을 불허하는 북한 관행이 음모론을 부추긴 측면도 있었다. 김 주석 사인을 둘러싼 의심은 오랫동안 지속됐고 2005년 1월 국내의 한 월간지는 북한 내에서 유통되는 반체제 유인물의 내용이라면서 ‘사망 방관설’을 보도하기도 했다. 이 얘기는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꽤나 알려졌던지 입국한 탈북자들 입에서 종종 확인됐다.
사망 방관설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화를 돋워 김 주석의 심장발작을 유발했다”, “심장발작으로 쓰러졌을 때 김 주석의 곁엔 이비인후과 전문의 한 명뿐이었다”, “심장담당 주치의가 없었다. 소식을 듣고 의료진을 태운 비행기가 출발했으나 기상악화로 회항했고 산사태로 구급차도 돌아왔다”, “의료진에 대한 책임 추궁이 없었다”는 등으로 구성됐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배후로 김 위원장을 지목한 것이었다. 김 주석은 사망 이전에도 몇 차례 피살설에 휩싸였다. 86년 11월 국내 한 신문이 ‘김일성 피격 사망’이라고 보도한 것은 유명한 오보사건이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