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의 고향] 최낙중 해오름교회 목사의 전남 승주
입력 2011-12-21 17:26
굿하던 집 앞에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송하자 기적이…
“꺼꿀아! 꺼꿀아!”
어린 시절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부른 내 이름이었다. 알고 보니 태어날 때 거꾸로 태어나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나는 전남 승주군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에 전교생이 구례읍에 가서 서커스를 보았다. 집에 돌아와 빨랫줄을 걸어놓고 외줄을 타려고 하다가 줄이 끊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래서 오른쪽 귓바퀴의 한 부분이 찢어졌다. 4학년 때는 괴도 루팡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친구와 함께 밤에 남의 집 딸기밭에 가서 딸기를 따다가 독사에 물려 죽을 뻔했다. 5학년 때부터는 축구선수가 됐다. 공부는 늘 1등을 해 교장, 교육감, 도지사 상을 탔다.
4월 초파일이면 어머니 손에 붙들려 화엄사에 가서 시주하고 절하였다. 종갓집 장손이셨던 부친은 집안의 제사를 도맡아 하셨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고1 때였다. 영양실조로 몸이 허약해졌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쓴 ‘죽음의 철학’을 읽었다. 어느 주일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나오다가 쓰러졌다. 의식이 들었을 때,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다. 쓰러진 나를 부둥켜안고 우시는 어머니의 굵은 눈물방울이 내 얼굴에 떨어졌다.
운명을 바꾼 선물- 성경
그때 강 건너편 교회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땡그랑 땡, 땡그랑 땡. 천국 있고 지옥 있다. 땡그랑 땡.” 정신이 번쩍 났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날 밤 신월교회 목사님을 찾아갔다. 당시 호남신학교를 다니면서 교회를 돌보는 김은식 전도사님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내 발로 찾아갔는데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하신 말씀은 훗날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전도사님은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문제있는 가정에서 자란 나에게 위로와 격려, 그리고 희망을 심어주었다. 성경책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내 운명을 바꿔 놓은 선물이 됐다. 강권하는 사랑에 의해 교회 등록을 하고 교회를 섬겼다. 어머니와 동생 다섯을 모두 전도하고 군에 갔다.
1969년 6월 25일 제대를 하고 고향에 왔을 무렵, 서울영락교회 남선교회에서 교회 없는 농어촌에 교회 세우는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주정일 전도사님이 우리 마을회관의 한 방을 빌려 개척교회를 시작한 것이다. 내가 제대하기 한 달 전인 5월 21일부터 시작한 것이다. 우리 마을에서 먼 곳까지 다니던 세 분의 교인들과 함께 윗마을, 중간마을, 아랫마을 모두 120여 세대를 복음화하기 위한 전도전략을 세웠다. 물론 본교회 교역자의 환송으로 된 일이다.
나는 6월부터 12월 초까지 동네 중·고등학생 10여명을 전도했다. 그 아이들과 함께 성탄절 새벽송을 돌 때다. 새벽 4시쯤에 여중 2학년 백딸말이네 집에 갔다. 그 집에서는 신들린 무당들을 불러 대굿을 하고 있었다. 다른 불신자 집 앞에서는 고요한 밤을 불렀다. 크게 외친 찬송가 소리에 잠이 깨면 욕을 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굿하는 집에서는 고요하게 찬송을 부를 일이 아니었다. 귀신 들려 괴로워하는 집에 가서 불러야 할 찬송은 ‘기쁘다 구주 오셨네’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딸말이네 집 문 앞에서 큰소리로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하고 크게 외쳤다. 갑자기 요란하던 징소리가 약해졌다. 다시 한 번 더 불렀다. 징소리가 사라졌다. 그때 딸말이 어머니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뛰어나왔다. “아니, 굿하는 집에 무슨 찬송이여! 우리 집 어쩌면 좋아. 큰일 났네!”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머니, 왜 그러세요?” “두 무당이 찬송 부를 때 다 쓰러졌어! 기가 죽어 눈도 못 떠. 이 일을 어쩌면 좋아!” “딸말이, 어머니! 찬송가 한 곡에 쓰러지는 귀신 왜 믿어요! 귀신을 내쫓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세요! 예수 믿으면 복 받아요!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는 도망치듯 그 집 앞을 떠났다.
그날에 그 집에 기적이 일어났다. 무신론자였던 딸말이 부친이 귀신도 하나님의 존재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크신 신을 믿어야 한다며 온 가족이 함께 교회를 나오게 된 것이다. 물론 그 무렵 알코올중독자였던 나의 부친도 예수를 믿게 됐다. 그렇게 해 세워진 교회가 바로 순천용림교회다. 올해로 42년이 되었다. 현재 100여명이 모이고 있다. 내가 군 제대 후 집사님들과 함께 섬진강 백사장에서 시멘트 벽돌을 만들어 지은 예배당이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다시 지었다.
매주 목요일 기독청년들 4000명 마커스워십
세월이 지나 신학교를 졸업하고 담임하던 해오름교회가 부흥돼 가고 있을 때, 어머니 권사, 형님 장로, 목사 사모가 된 두 여동생 등 우리 가족과 우리 교회 중직자들이 교회 대형버스를 타고 순천중앙교회에 갔다. 3일간 부흥회를 한 후 나온 헌금과 받은 사례금을 보태 승합차 한 대를 사드렸다. 고향을 떠나온 지 벌써 오래되었지만 용이 나오는 수풀이라는 이름(龍林)에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로 우상숭배와 귀신에게 제사 드린 죄악들이 지워졌다. 그곳에 희망을 노래하는 주님의 몸이 세워진 것이다. 전에는 가시밭이었던 고향이 이제는 ‘에덴’이 됐다.
해오름교회로 올라가는 길가에 국화가 피어 있다. 영하의 날이 몇 번 지났는데도 아직 죽지 않았다. 시들지도 않고 아직도 많이 피어나기 위해 꽃망울을 지닌 것들도 많다. 천막을 치고 해오름교회를 개척한 지 39년이 됐다. 매주 목요일이면 4000여명의 20·30대의 젊은 기독청년들이 모인다. 마커스워십이다. 초교파로 모인 젊은이들의 열정에서 민족의 희망을 본다.
누가 오늘의 한국교회를 비난하고 폄하하는가? 아직 때 묻지 않은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있다. 한국교회와 민족과 세계 만민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기독 청년들이 있다. 그들에게서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의 희망을 본다. 제도 때문에 싸우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의 본질인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이들이 역사의 주역이 된다. 나는 남은 생애를 글로벌 시대에 기독교 리더들을 양육하여 세우는 일에 힘쓰려고 한다. 그래서 백석대 기독학부 초빙교수를 시대적 사명으로 알고 있다.
어려운 이웃 돕는 교회로 세상 밝힐것
지금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할 때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야 한다. 십자가의 길(Cross Way)이란 예수님이 가신 그 발자국 위에 우리의 발자국을 포개어 걷는 것이다. 전에는 가난한 자들과 소외 계층이 모여 살던 관악구에서 시작한 해오름교회가 이제는 영적부요로 충만해 서로 섬기는 교회, 어려운 이웃을 돕는 교회가 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요즘에 교회에 등록한 사람들 중에 70% 이상은 청년들이다. 강한 훈련을 감당하기에 전도팀, 중보기도팀, 구제팀, 찬양팀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있다. 밝고 따뜻하고 힘 있는 해처럼 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결혼 후 5년까지는 신혼공동체에서 교제를 나눈다. 교회가 몸이라면 청년은 허리다. 운동선수가 같은 몸의 무게, 테크닉을 가졌어도 허리가 유연하고 허리힘이 강한 선수가 이긴다. 허리가 병이 나면 온몸을 쓰지 못한다. 그래서 허리힘을 기르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 최낙중 목사
1946년 전남 승주에서 태어났다. 목회자이며 신학자이고 부흥사다. 서울기독대에서 선교신학을 공부한 뒤 필리핀 바위오중앙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백석대에서 명예신학박사도 받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 총회장과 한기총 공동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백석대 목회대학원 초빙교수, 한국기독교복음단체총연합 대표회장, 2017종교개혁500주년성령대회 총재, 해오름교회 담임목사로 봉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우개’ 등 13권의 저서가 있다.
정리=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