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세 줄줄 새는 정책연구용역] 공무원들 “반영 의무 없다”… 활용도 낮은 용역보고서

입력 2011-12-20 18:46


(2) 보고서 내면 끝… 불투명 정책 반영

국민일보 특별취재팀은 2010년 41개 중앙행정기관이 발주한 정책연구용역사업을 무작위로 선택해 담당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정책 활용 여부를 취재했다. 용역보고서의 정책 반영 정도를 묻는 질문에 대다수 과제담당관은 “향후 정책을 펴는 데 참고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모호하게 답했다. 일부 공무원은 “정책연구가 반드시 정책에 활용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책 활용 여부가 파악되지 않은 용역사업도 많았다. 정책 과제조차 기억 못 하는 공무원도 있었다. 일부 과제담당관은 “보고서가 완료되면 그걸로 끝”이라는 대답을 하기도 했다.

특별취재팀이 만나거나 전화 취재한 공무원은 80여명이었다. 이 중 일부는 답변을 거부했다. 41개 중앙행정기관 중 39개 기관이 취재에 응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보안을 이유로, 대검찰청은 다른 부처와의 협의를 이유로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겉으론 높은 정책 반영률, 실제는 모호=각 행정기관의 정책연구 과제담당관은 연구가 끝난 뒤 6개월 내에 결과물에 대한 활용 상황을 각 부처 정책연구용역심의위원회에 보고하고 정책연구용역 종합관리시스템(프리즘·PRISM)에 공개해야 한다. 세금 수천억원을 들여 만든 정책연구가 활용되지 않고 사장(死藏)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다.

프리즘 용역 활용 현황에 따르면 2010년 정책연구 중 올해 12월 현재 완료된 1918건의 정책연구 중 520건(27.1%)은 법령 제·개정에, 314건(16.4%)은 제도개선과 정책 반영에 활용됐다. 또 639건(33.3%)은 향후 정책에 참조할 계획이다. 활용 여부를 보고하지 않은 425건과 보고서 제출 기한 전인 19건을 제외하면 전체 정책연구의 76.8%가량이 정책에 활용됐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객관적 자료는 없다. 정책연구 활용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 없이 정책 반영 정도를 과제담당관이 자의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용역보고서의 어떤 내용이 어떻게 정책에 반영됐는지를 묻는 질문에 속 시원한 대답을 듣기 힘들었다. 정책연구 3건 중 하나 꼴로 ‘정책 참조’라는 모호한 결정이 내려진 것도 이 때문이다.

◇기초자료로 활용했다는 말만 반복=현실은 통계 수치보다 훨씬 심각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위원회의 요청으로 ‘교육과학기술 글로벌 협력의 신국가전략 구상’(5000만원) 등 3편의 용역보고서를 발주했다. 그러나 교과부 관계자는 “용역보고서가 나온 뒤부터 자문위원들이 관리해 어디에 활용됐는지 알지 못 한다”면서 “연구용역비는 우리가 집행했지만 용역보고서 활용처는 확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원화국제화 관련 해외사례조사 연구’(1000만원)를 발주한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원화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비슷한 정책을 짠 외국 사례를 살펴본 것”이라며 “어느 정책에 반영한다기보다는 백그라운드(배경) 정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정책연구 활용 계획이 구체적이지 않은 탓에 각 행정기관이 작성한 활용결과보고서 역시 모호한 표현으로 일관됐다. 국민일보가 입수한 활용결과보고서에는 ‘자문 보고에 활용’, ‘정책 의제 기초자료로 활용’, ‘정책과 밀접히 연계’, ‘관련정책 추진 시 적극 반영’ 등의 추상적 표현으로 가득했다.

◇정책 활용 어려움에 이 핑계, 저 핑계=정부 부처 관계자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정책 반영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정책연구 ‘항공산업 맞춤형 금융 지원방안’(7000만원) 보고서에 대해 지식경제부 관계자는 “항공기 개발금융에 대한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인식은 있지만 관계부처와 협의가 안 돼 구체적인 안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른 지경부 관계자는 “정책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무조건 정책에 반영할 의무는 없다”고 했다.

‘지방 대도시권 고유의 역사·문화역량 확충방안 연구’(5820만원)를 발주한 국토해양부 관계자도 “지방 문화발전 정책을 보완하려고 발주한 것이지만 지방자치단체와 협의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며 “아직 정책 반영 여부를 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류스타 거리 조성방안 연구용역’(4750만원)을 추진한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한류스타 거리를 만들려면 주민의견을 수립하기 위한 공청회도 진행해야 하지만 예산집행이 안 됐다”며 “용역보고서는 연구자료로 활용됐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관계부처, 지자체, 주민 등과 사전에 협의한 뒤 용역보고서를 발주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규정 어기고 활용결과보고서 공개 안 해=활용보고서를 제대로 만들지 않은 사례도 많았다. 활용보고서는 정책연구의 활용 목적과 방안 등이 담겨 있으며 연구용역이 끝난 뒤 6개월 내에 반드시 제출해야 한다.

‘농어촌 통합형 지역개발 모델 정립을 위한 연구용역’(1억5000만원)을 발주한 농림수산식품부 관계자는 “평과결과서와 용역보고서는 올렸지만 활용보고서는 처음 듣는 말이라 잘 모르겠다”고 했다. ‘중국 정보법제에 관한 연구’(1500만원)를 담당한 법제처 관계자는 “연구용역보고서가 완료되면 그것으로 끝난 일이기 때문에 정책 반영 여부는 알 수 없다”며 “정책연구를 발주한 뒤 일일이 활용보고서를 쓰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활용보고서는 반드시 프리즘에 공개돼야 하지만 지금껏 단 1건도 공개되지 않았다. 프리즘을 관리하는 행정안전부가 활용보고서를 공개할 시스템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연구용역이 어떤 과정을 통해 정책에 반영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공무원과 연구자가 정책에 반영됐다고 하면 믿을 수밖에 없다.

특별취재팀=하윤해 천지우 이도경 이선희 최승욱 진삼열 김미나 사회부 기자, 전웅빈 경제부 기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