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사망] 허무하게 끝난 ‘독재’… 권력 장악위해 삼촌 김영주·동생 평일 등 제거

입력 2011-12-19 21:56


“대체로 1974년부터 85년경까지는 ‘김일성-김정일’ 이중정권 시대였다고 볼 수 있고, 85년부터 94년까지는 ‘김정일-김일성’ 이중정권 시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85년쯤부터 김정일은 사실상 모든 부문의 사업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91년 인민군 총사령관이 된 다음부터는 최고 권력의 승계가 끝났다고 볼 수 있다. 90년대 들어서는 김일성은 김정일의 ‘고문격’이 되고 말았다.”

고인이 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회고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30대 초반인 74년 후계자로 내정된 후 37년간 북한을 철권 통치해 왔다. 90년대 이후 유일 권력자가 된 김 위원장은 경제난과 탈북사태, 전 세계적인 재스민 혁명의 물결 속에서 힘겹게 정권을 유지해왔다. 김정일 시대를 겪으며 북한의 체제 결속은 심각하게 이완됐고 경제적 어려움은 증가했다. 개혁개방 대신 핵을 중심으로 한 긴장 조성과 외교적 수완으로 위기 탈출을 모색하던 김 위원장은 후계구도조차 안정화시키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출생과 유년기=김정일의 출생과 관련한 사실은 북한의 최고기밀에 속한다. 북한 당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김정일은 42년 2월 16일 양강도 백두산의 항일빨치산 밀영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러나 김정일의 출생연도와 출생지는 북한의 공식발표와 다르다는 것이 정설이다.

김정일의 실제 출생연도는 41년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소부대가 만주에서 일제의 공격을 피해 41년쯤 이곳 소련군 영내로 옮겨왔고 여기에서 김정일이 태어나 네 살까지 살았다. 북한이 김정일의 출생연도와 출생지를 조작한 것은 김일성 정권 수립의 기초가 되는 항일혁명 역사를 신비화하고 김정일 후계체제의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정치적 상징조작으로 해석된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김정일의 유년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같이 놀던 남동생 슈라가 익사했고 7세에 어머니까지 여읜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김성애의 손에서 성장한 경험은 ‘모성 결핍’으로 이어졌다. 김 위원장은 후일 계모 및 이복형제와 냉혈한 권력투쟁을 벌이고 오로지 어머니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5살 연상의 여배우 성혜림과 동거하기도 한다.

김 위원장은 60년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해 이듬해 7월 노동당에 입당했다. 대학시절 그는 영화에 깊이 매료된다. 매일 중앙영화보급소로 등교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의 광적인 영화 취미는 훗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 주기도 한다. 영화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인정받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64년 6월 대학을 졸업한 그는 노동당 조직지도부에서 지도자로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권력세습 과정=김 위원장은 당 조직지도부를 통해 정치에 입문한 이후 10년간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았고 김일성의 신뢰를 받아 73년 후계자 자리인 당 조직 및 선전비서에 임명된다. 이어 이듬해 2월 제5기 8차 당 전원회의에서 김 주석의 공식 후계자로 내정됐다. 이 시점부터 노동신문은 김정일에게 ‘당 중앙’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김정일이 권력장악을 위해 가장 몰두한 것은 최대 정적이었던 친인척 제거였다. 권력 2인자였던 삼촌 김영주 당시 당 조직지도부장, 정치적 힘을 과시하던 계모인 김성애, 김일성의 남다른 사랑을 받던 이복동생 평일 등이 그 대상이었다. 김영주는 70년대 후반 자강도 강계로 쫓겨나 외부와 격리된 채 사실상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김정일은 90년대 초에야 김영주를 부주석으로 복원시키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이라는 유명무실한 직책을 내주었다. 또 계모와 이복동생들을 ‘곁가지’로 규정하고 75년부터 이들과 조금이라도 연결된 사람들을 전부 조사해 추방했으며 본인들은 모두 해외에 내보내 국내에서 새로운 추종세력이 형성되거나 결집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김정일은 74년 후계자로 공인된 후 6년간 정적을 제거하고 곳곳에 자기 사람을 심는 등 국가권력 전반을 사실상 장악했다. 80년 10월 6차 당대회를 통해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며 그는 당 3대 권력기구를 장악했다. 이때부터 그는 서열상 2인자였지만 실질적으론 북한의 통치자로 군림했다. 김정일이 실권을 잡은 80년대 미얀마 아웅산 폭파사건(83년), KAL기 폭파사건(87년) 등이 발생했다.

김정일은 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91년 12월 최고사령관, 92년 공화국 원수에 추대된 데 이어 93년 김일성으로부터 국방위원장직을 공식 승계함으로써 권력 승계 절차를 마무리했다.

◇김정일 시대=94년 7월 8일 새벽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명실상부한 김정일 시대가 시작됐다. 그러나 북한의 상황은 엉망진창이었다. 북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한 이 시기에 국가경제와 식량배급제는 완전히 붕괴해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대외적으로도 고립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김 위원장은 김일성에 대한 3년상을 빌미로 ‘유훈통치’ 기간을 설정, 당시 상황에 대한 책임을 김일성과 나눠 지려 했다. 특히 내부의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루려는 의도로 그는 군을 우대하고 군에 의존하는 군부통치로 북한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나갔다.

김 위원장은 김일성 3주기를 마친 뒤 97년 9월 추대 형식으로 당 총비서에 올랐으며 이듬해 10월 제10기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최고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국방위원회의 수장으로 재추대됐다. 군부통치는 ‘선군정치’로 명명됐고 김정일 시대의 강력한 통치구호로 자리 잡았다.

김 위원장은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몇 가지 과감한 시도를 선보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에 착수했고 2009년 11월에는 화폐개혁도 감행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막히자 김 위원장은 2010∼2011년 세 차례 중국을 방문해 황금평과 나진 특구 건설에 의견을 모았으며, 지난 8월에는 러시아 극동지역을 방문해 남·북·러 3국을 관통하는 가스관 연결사업에 합의했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기대한 대로 과감한 개혁개방으로 나가진 못했다.

김 위원장은 위기 탈출의 또 다른 돌파구로 외교를 적극 활용했다. 김 위원장의 외교적 행보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2000년에 반세기 만의 남북 정상회담을 했고, 미국과도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2002년에는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평양으로 불러들여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를 시인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또 한동안 소원했던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방문외교를 재개하고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적 성장을 이룬 이들 국가의 노하우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이어가기도 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