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혁명적 신학자 토마스 뮌처 (下)
입력 2011-12-19 20:45
작은 교회서 하층민 비참한 삶 목격… “만인은 평등” 부르짖고 처형당해
세상에 불을 지르기 시작한 혁명의 신학자 토마스 뮌처는 누구인가? 그는 독일 작센주 하르츠에 있는 작은 동네 스톨베르크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전통적인 인문학 과정을 마친 후 프랑크푸르트 오더에서 신학수업을 받았다. 신학수업을 받으면서 특히 교부 철학자, 신비주의자, 요아킴 폰 피오레 그리고 성서공부에 관심을 기울였고, 헬라어와 히브리어도 배웠다. 대학을 졸업한 후 1516년 프로제에 있는 수도원의 수석신부로 일하였다. 그리고 1517∼1518년 브라운슈바이크 마르티네움시의 고등학교에서 가르쳤다. 뮌처는 루터가 면죄부를 비판하기 이전부터 면죄부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나타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어올렸을 때 당연히 그는 종교개혁 사상을 열렬하게 지지했다. 루터가 활동했던 비텐베르크로 가 머물면서 필립 멜랑히톤과 알게 됐고, 1519년 7월에는 루터를 만나기도 했다.
루터는 그를 종교개혁의 열성당원으로 인정해 츠비카우의 교회 사제로 추천을 했다. 츠비카우의 성마리아 교회에서 담당 사제인 요한 실비우스 에그라누스가 휴가여행을 간 사이 뮌처는 그의 일을 대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에그라누스가 다시 복직하자 츠비카우의 작은 카타리파 교회를 담당하게 된다. 이 카타리파 교회를 담당하면서 그에게 변화가 시작된다.
성마리아 교회의 구성원들이 상류층과 중산층이었다면 그가 담당한 카타리파 교회는 수공업자, 광부, 그리고 직조공 등 하층민들이 출입하는 교회였다. 그는 이 교회를 통해 하층민들의 비참한 삶과 고통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루터와 다른 종교개혁적 성향을 띤 츠비카우의 예언자들에게 관심을 쏟는다. 그들은 종교개혁뿐만 아니라 급진적인 사회개혁도 주장했다. 그들의 대표자격인 니콜라우스 스토르히는 ‘8항목’을 통해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위정자와 성직자들에 대해 비판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똑같고 평등한 위치라면 또한 모든 것이 공동의 필요에 따라 사용되고 쥐새끼 같은 왕을 더 이상 섬기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색욕에 가득 차고 나쁜 성직자들과 뚱뚱한 호색가들은 없어져야 한다.”
이때부터 뮌처는 자신이 관심을 기울여 왔던 신비주의와 또한 츠비카우 예언자들의 영향으로 성서 문자에 집착하는 인문주의적 입장을 떠나 직접적인 성령체험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뮌처가 이런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표명하게 된 것은 성마리아 교회의 담당 사제인 에그라누스와의 분쟁 때문이었다. 에그라누스는 에라스무스주의자로 인문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에그라누스가 중산층의 입장을 대변하며 훌륭한 삶을 지향하는 조용한 인문주의자였다면, 뮌처는 평신도들의 삶의 고통을 함께하며 예수의 고난이라는 문제를 고민하는 뜨거운 심장의 신학자였다. 에그라누스와 뮌처의 반목과 갈등은 도시가 양분되는 결과를 가져 왔고, 그 결과 폭동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국 에그라누스를 지지한 시의회는 1521년 4월 16일에 뮌처를 해임했다. 뮌처는 츠비카우를 떠나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고향이자 천년왕국적 전통이 살아 있는 프라하로 갔다. 그는 프라하에서 설교했고, 그곳에서 그의 신학적 입장을 나타내는 최초의 신학문서인 ‘프라하 선언’을 쓴다.
이 선언에는 루터와 또 다른 그의 입장을 내세운다. 프라하 선언에서 뮌처는 루터의 ‘문자적 믿음’에 대해 ‘영적 믿음’을 대립적으로 내세웠다. 그가 영적 믿음을 내세운 이유는 루터가 주장하는 문자적 믿음이 성령과의 만남이 없을 때 얼마나 현학적이고 기만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다수 민중이 문맹자였던 시대에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였다.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제들은 그러한 점을 이용해 성서의 내용을 차단하며 은폐시킬 수 있다. 뮌처는 성서를 통해 증언되는 ‘가련한 민중의 살아 있는 목소리’가 그렇게 차단되고 은폐되었다고 보았다. 이와 관련해 뮌처는 이 프라하 선언에서 세 부류의 무리들에 대해 비판한다. 첫 번째 부류는 성서를 은폐시키는 사제들과 승려들이며, 두 번째는 민중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영주들이고, 세 번째 부류는 ‘죽은’ 지식을 대변하는 ‘멍청한 불알 달린 박사들’이었다. 뮌처는 이렇게 프라하에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야심차게 표명하고, 추종자들을 모았지만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그는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잠시 고향과 할레의 수녀원에서 일하다가 알스테트의 요한 교회의 사제로 일하게 된다.
그는 알스테트에서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다. 독일어로 예배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독일어 예배는 루터보다 3년이나 앞선 것이다. 독일어 예배는 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을 예배에서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독일어 예배를 드린 목적은 가난한 평신도에게 성서의 말씀을 들려주고 그들이 하나님과 직접 만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뮌처는 더욱 분명하게 루터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뮌처는 루터가 쓰라린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강조하지 않고 달콤함만을 강조하며 반쪽 그리스도만을 가르친다고 비판했다. 뮌처는 민중의 고통과 함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강조했다.
뮌처의 설교는 지배계층의 달콤하고도 안락한 삶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뮌처는 1524년 7월 13일 독일의 영주들에게 불려가 설교했다. 그 자리에서도 그는 영주들에게 민중을 위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실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칼을 빼앗아 성난 백성들에게 줄 것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파멸할 것이다”라고 과감하게 선언했다. 당연히 영주들은 뮌처의 설교에 위협감을 느꼈다. 작센의 영주 요한은 뮌처를 법정에 출두하라고 요구했고, 뮌처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과 비슷한 사상을 가진 파이퍼가 있는 뮐하우젠으로 도피했다. 뮐하우젠도 그의 영향으로 시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그를 추방했다. 그는 추방된 뒤 독일 서남부의 폭동지역을 여행했다. 그는 다시 추종자들의 요청으로 뮐하우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농민 봉기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점점 더 사회개혁자의 길로 나선다. 그 사이 뮐하우젠에도 독일 남부에서 불타오른 농민반란의 불씨가 옮겨 붙었다. 물론 뮐하우젠의 봉기에는 뮌처의 선동도 작용했다. 뮌처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의 종으로 기드온의 칼로 경건치 못한 자들을 대적하라고 선동했다. 1525년 뮐하우젠 근처 프랑켄하우젠에서 농민들과 영주들 간의 일대 결전이 벌어졌다. 뮌처는 직접 농민들을 이끌었다. 조직된 정예군대와 압도적인 수를 가진 영주들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농민들은 패했고, 뮌처는 사로 잡혀 고문을 당했다. 1525년 5월 27일 훈풍이 불어오는 날 53명의 동료들과 함께 처형을 당했다. 그는 고문을 당하고 자기의 계획을 이렇게 고백했다.
“영주이든 백작이든 귀족이든 만인은 평등하다는 이런 원리를 행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그 목을 치거나 교수대에 매달려야 한다.”
종교개혁뿐 아니라 평등과 자유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 짧은 생애를 불꽃같이 살다 간 신학자 뮌처는 사회주의 혁명의 역사적 아이콘이었다. 동서독이 서로 대립하던 시절 뮌처는 동독 화폐에 등장하기도 했다. 그가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선구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지만 그가 꿈꾸었던 종교적 이상의 세계는 분명하다. 그것은 만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하나님의 세계였다. 그러한 세계를 이루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다고 그는 순교자의 죽음으로 증언하고 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