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세 줄줄 새는 정책연구용역] 1억대 예산 투입 5편, 他 보고서 등 사실상 100% 베껴
입력 2011-12-18 21:31
국민일보 특별취재팀은 수천만원의 연구용역비를 받은 최소 5편의 용역보고서가 기존 논문과 보고서 등을 사실상 100% 베낀 사실을 밝혀냈다. 이들 용역보고서에 정부 예산 1억1550만원이 들어갔다.
연구자들은 다양한 수법을 동원했다. 자신의 기존 논문과 보고서를 완전히 베끼거나 서로 다른 연구물을 짜깁기해 용역보고서를 만들어냈다. 인터넷 정보를 그대로 옮긴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베끼고 짜깁기한 문장 속에 새로운 연구는 없었다.
◇자신의 기존 연구물을 재탕·삼탕=박기갑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용역보고서 3편은 전형적인 부실 사례로 지목됐다. 이 중 2편의 용역보고서는 일부 문맥만 살짝 고쳤을 뿐 사실상 100% 베낀 것으로 확인됐다. 박 교수는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을 통해 교육과학기술부의 연구용역 작업을 수행했다. 용역보고서의 제목은 ‘개정 원자력손해배상협약 국내 이행방안 연구’였으며 연구용역비는 1100만원이었다. 2009년 12월에 공개됐으며 전체 318쪽이다.
그러나 이 용역보고서는 박 교수 자신이 책임연구자로 발표한 ‘현행 원자력손해배상제도 개선방향에 관한 연구-환경오염과 테러위험 담보문제를 중심으로’(2008년 11월 발표)와 역시 자신의 연구물인 ‘원자력손해배상관련 국제협약 가입 및 국내제도기반 구축에 관한 연구’(2003년 발표)를 합쳐 만들었다. 기존 연구물 2개를 100% 짜깁기한 용역보고서였다.
박 교수는 외교통상부로부터 발주 받은 ‘국제보충기금 협약(CSC) 가입에 따른 법적 문제점 검토’라는 용역보고서를 2010년 12월에 공개했다. 연구용역비 2000만원에 122쪽 분량이었다. 하지만 외교부 용역보고서도 위의 2008년 11월 발표 보고서와 2003년 보고서를 거의 100% 짜깁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존 2편의 연구 결과물을 편집해 새로운 제목의 용역보고서 2편을 만들어낸 셈이다.
박 교수는 “2008년 11월 보고서는 한 다국적 보험회사가 내부용으로 쓸 것이라며 보고서 용역을 부탁했다. 이 회사가 대내적으로만 쓴다고 해서 정부 용역보고서에 활용했다”면서 “경솔했다면 경솔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어 외교부로부터 ‘주요국의 재외선거제도 연구’라는 용역보고서를 책임연구자 자격으로 2010년 12월에 발표했다. 연구수행비는 2000만원이었고 분량은 138쪽이었다. 이 용역보고서 역시 선거관리위원회가 2009년 4월에 발표한 ‘각 국가의 재외선거 위법행위 발생사례와 투표율 향상을 위한 방안’에서 대부분 문장과 표를 가져왔다. 박 교수는 “내가 너무 바빠 석·박사 과정 제자들이 연구를 수행했다”면서 “관리 부실이었다”고 실토했다.
◇10개의 다른 보고서를 짜깁기=이상희 한국산업기술대학 교양학과 교수는 지식경제부로부터 3000만원의 용역을 받아 참고문헌을 포함, 131쪽의 ‘노동유연성 제고방안 우선 고려요소 검토’라는 용역보고서를 2010년 6월 제출했다. 그러나 이 용역보고서는 이 교수 자신이 집필한 ‘정상적 노사관계 구축과 노동시장 유연화 타깃 설정 및 해소’(2009년 12월) 등 자신의 기존 연구결과물 3편과 다른 학자의 연구결과물 7편 등 모두 10편을 합쳐 놓은 보고서였다.
각주를 달아놓긴 했으나 이 보고서도 사실상 100% 기존 연구물을 모아 편집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교수는 “노동유연성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자주 바뀌어 내부 교재용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보고서 내용만으로 용역 서비스를 판단하지 말아 달라”면서 “용역을 의뢰한 지식경제부에 자문서비스도 제공했다”고 해명했다.
◇“새로운 내용 없더라도 흩어져 있는 것 모은 것도 연구”=국가보훈처는 정책연구용역으로 6·25전쟁에 참가한 각국 군대의 참전사를 편찬하고 있다. 2700만원을 투입해 2010년 6월 발표된 ‘네덜란드군 6·25전쟁 참전사’는 전사편찬위가 1979년에 발간한 한국전쟁사 10권을 중심으로 주네덜란드 한국대사관 홈페이지, 네이버 등 인터넷 백과사전, 언론보도물, 외교통상부가 2005년에 발간한 네덜란드 개황 등의 단락이나 문장을 통째로 가져왔다. 심지어 어린이신문의 문장도 발견됐다. 2750만원을 들여 같은 달 마무리된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태국-태국군 6·25전쟁 참전사’도 한국전쟁사 11권, 2009년 4월에 발간된 외교통상부 태국 개황, 인터넷 두산백과사전 등과 거의 100% 일치했다.
네덜란드군 참전사 집필에 참여한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참전사는 전문가가 아닌 한국 국민과 네덜란드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 과거에 나온 얘기를 쉽게 엮는 작업”이라며 “국가보훈처의 지침을 따랐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6·25전쟁의 발발 배경이나 전개, 각국 지원 현황 등은 통일된 시각을 마련하기 위해 문장을 일치시켰다”고 밝혔다.
보훈처 관계자들은 연구자들이 다른 부분까지 베낀 사실을 시인했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은 학자의 몫”이라며 “공무원이 구체적인 내용까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또 “우리 입장에서는 중복이지만 외국인 입장에서는 중복이 아니다”며 “새로운 내용이 없더라도 흩어져 있는 것을 모은 것도 연구라고 본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하윤해 천지우 이도경 이선희 최승욱 진삼열 김미나 사회부 기자, 전웅빈 경제부 기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