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 든 성배’ 받은 그들, 영광은 짧고 고통은 길다… 조광래 경질 계기로 본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

입력 2011-12-18 17:39


대한민국에서 그 자리에 오를 때와 내려올 때가 가장 확연히 대비되는 두 직업을 꼽는다면 대통령과 축구대표팀 감독이라는 말이 있다.

두 자리 모두 국민적인 관심을 받고, 본인들이 수행한 결과에 대해 무제한적인 최종 책임을 져야하는 점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축구대표팀 감독이 받는 화려함 속 고통을 강조하기 위한 약간은 과장된 말이지만 역대 감독사를 보면 아예 틀린 얘기는 아니다.

◇“영광은 짧았고 고통은 길었다”=조광래 감독이 최근 전격 경질되면서 앞으로 대표팀 감독이 받아야 할 잔은 ‘독이 든 성배’가 아닌 ‘독만 든 폭탄주’라는 소리가 축구계에서 돌고 있다.

지난해 남아공에서 한국의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을 달성한 허정무 전 대표팀 감독은 16일 “대표팀 감독이 받는 스트레스를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굳이 따지면 대표팀 감독은 병력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선 사령관 비슷한 처지”라고 말했다. 전남 목포에서 현 소속팀 인천 유나이티드 선수들과 함께 전지훈련 중인 허 감독은 “사령관의 잘못된 판단과 실수로 나라의 운명과 군인들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것처럼 대표팀 감독도 엄청난 책임감을 24시간 내내 갖고 살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허 감독도 남아공월드컵 아시아 예선 당시 경기력 부족으로 경질론에 시달렸었다.

허 감독은 “대표팀 감독 시절 가급적이면 사람들이 많은 공공장소에 가지 않으려 했다.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한국 축구는 물론 대표팀 이미지와 직결되기 때문에 극도로 절제된 생활을 했다”고 밝혔다. 이어 “대표팀 감독의 영광은 짧았고 고통은 길었다”고 씁쓸해했다.

◇히딩크·허정무 성공, 차범근 최악=홈에서 2002 한·일월드컵 4강을 이룬 거스 히딩크(네덜란드) 감독 다음으로 좋은 월드컵 성적을 낸 허 감독은 그래도 행복한 편에 속한다. 히딩크와 허정무는 역대 한국 대표팀 감독 가운데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가장 성공한 케이스로 볼 수 있다.

대표팀 감독으로서 최악의 시기를 보낸 지도자는 1988 프랑스월드컵의 차범근 감독이다. 차 전 감독은 프랑스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에서 멕시코에 1대 3 역전패하고, 2차전에서 네덜란드에 전반 2골, 후반 3골을 내주며 0대 5로 참패한 뒤 프랑스 현지에서 전격 경질됐다. 차 전 감독은 홀로 쓸쓸히 귀국짐을 쌌고, 3차전 벨기에전은 김평석 수석코치가 감독대행 체제로 치렀다.

1996년 12월 아시안컵 8강전에서 이란에 2대 6으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뒤 경질된 박종환 감독도 끝이 좋지 않았다. 당시 이란전 참패 뒤 방송된 KBS 심야토론 주제가 ‘한국 축구, 어디로 가나’였을 정도다.

제2의 히딩크 성공신화를 꿈꾸며 대한축구협회가 2003년 2월 영입한 움베르토 쿠엘류(포르투갈) 감독은 동아시아 대회 부진 등으로 1년 2개월 만에 고국으로 돌아갔다. 2004년 6월 대표팀 감독을 맡은 요하네스 본프레레(네덜란드) 감독 역시 2006 독일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졸전으로 2005년 8월 경질됐다.

대한축구협회는 히딩크∼핌 베어벡(네덜란드)까지의 외국인 감독 시대를 지나 허정무-조광래로 이어지는 내국인 감독 시스템 착근을 시도했다.

그러나 조광래 체제의 실패로 대표팀 지도 모델을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

이용훈 기자 co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