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서민정] 甲이 돌아본 한 해
입력 2011-12-18 17:52
해마다 연말이면 고민이 한 가지 생긴다. 꺼놓을 수는 없고, 켜놓기는 번거로운 휴대전화 문제다. 송년 인사를 하는 문자메시지로 끊임없이 드르륵거리며 요동치는 그것이 나를 적잖이 번거롭게 하는 것이다.
올해도 수없는 문자 알림 소리를 듣다 문득 휴대전화에 저장돼 있는 연락처 전체를 종이로 출력해 보았다. 종이가 몇 장을 넘어가더니 2800여명이 인쇄되었다.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 비교적 자주 연락하는 지인들을 합해봐야 100명 남짓이니 이를 제한 2700명 정도가 일하면서 만난 분들이다. 지금 다니고 있는 일터가 첫 직장과도 다를 바 없으니 7년 동안 일하면서 그 정도의 사람을 만난 것이다.
이것이 비슷한 경력을 가진 다른 사람들보다 적은지 많은지 알 수 없으나 나에겐 놀라운 수치다. 매해 385명을, 주5일 근무 기준으로 한 해를 240일로 치면 매일 1∼2명의 새로운 사람을 만났으니 말이다.
명단을 보다가 한 가지 더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명단 중 대략 80%는 내가 굳이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될 분들이라는 점이다. 세금을 받아 사업을 지원하는 것이 주된 역할인 공공기관에서 계속 일해 온 결과일 터다. 공공기관에서는 소위 말하는 ‘갑을(甲乙)관계’에서 일을 의뢰하는 ‘갑’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잦다.
그러니 휴대전화에 대한 나의 진짜 고민은 끊이지 않는 문자 알림이 아니라 송년 인사에 답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였다. 한번이라도 뵌 분들인데 무시하기는 마음에 걸리고, 일일이 답하는 건 번거롭게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뭔가를 부탁하거나 일을 얻어야 하는 입장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안부 문자를 주고받는 것에 대해 식상해하거나 번거롭게 여겼을까. 생각이 여기에 닿으니 역으로 내가 직장을 관두게 되었을 때에도 연락해줄 분이 얼마나 될까 가늠해 보니 갑자기 자신감이 사라진다.
조직에 속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능력 이전에 조직이 가진 위치와 영향력을 등에 업고 일하게 된다. 공공적 기능을 가진 조직은 더욱 그러하다. 갑을관계를 떠나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고 협업하며 일한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명색이 조직과 돈으로 ‘지원’하는 기관이면 어느 자리에서든 존대 받기 마련인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공공기관에 있다 보면 조직이 만들어낸 자리 혹은 관계가 마치 자신의 능력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공익을 위한 기관에서 행하는 일의 과정이나 결과에 대한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고, 2011년 사자성어로 꼽힌 ‘엄이도종(掩耳盜鐘)’ ‘여랑목양(如狼牧羊)’과 같은 낯선 말들도 그 뜻이 모두 공공 업무를 향해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연치 않게 연락처로 돌아본 나의 직장생활이 그저 사적인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 연말이다.
서민정 문화예술교육진흥원대외협력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