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회심-세실내과의원 홍관수 원장] 친구 인도하지 못한 평생의 빚 ‘섬김의 삶’ 가르침으로
입력 2011-12-18 17:59
고교시절 계원은 그렇게 눈에 띄는 친구는 아니었다. 그렇게 친하게 지낼 계기가 없었는데 어느 날 그는 자기 집에 가자고 했다.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잔잔하면서도 진심 어리게 말하는 그의 초대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굉장한 클래식 성악 애호가였다. 의외의 모습에 계원을 보는 시각도 조금 달라졌다. 그는 상당한 음악지식과 함께 성숙한 인생관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거의 말씀이 없으시고 평생 묵묵히 당신의 일을 성실하게 해오셨다고 했다. 알코올 중독자로 평생 가족을 괴롭혀 온 나의 부친과 비교하면 정말 천사 같으신 분이었다.
상급생으로 진학하면서 반이 갈린 나는 가끔 복도에서 그를 만났지만 대학입시를 눈앞에 둔 우리는 별로 할 얘기도 없었다. 그리곤 각자 대학에 입학했다. 계원은 학교 축제에 날 초대했다. 계원에게 그때 처음 내가 교회에 다닌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계원은 교회로 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난 그 약속이 꼭 지켜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계원은 정말 교회로 찾아 왔다.
나의 성의 없는 태도에도 계원은 항상 나를 찾았다. 많은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왔지만 계원을 데리고 온 적은 없었다. 솔직히 계원에게서 친구로서의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 계원의 교회생활을 위한 나의 배려는 거의 없었다. 만약 계원이 교회생활에 잘 적응해 남아 있으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계원은 교회의 현실참여를 강하게 원했다. 왜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순에 대해 방관하고 자기들끼리만 즐거워하는가를 여러 차례 토로했다. 소외된 계층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의 문제와 고민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다른 문제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나를 계발시켜 내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앞서고 싶었다.
결국 계원은 교회 출석이 불규칙해졌고 난 오히려 계원에 대한 부담감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교회 목사님의 종용으로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됐다. 계원은 집에 없었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음 주가 됐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대학부 동료 집에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버스정류장에서 계원이 뛰어 오는 모습이 보였다. 계원은 자기가 없는 사이 내가 다녀갔다는 말을 듣고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사과하러 왔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그 모습이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약간은 나무라듯 “그러면 됐지 왜 여기까지 찾아오느냐”는 투로 계원을 돌려보냈다. 그 순간의 계원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섭섭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고 한동안 우산을 든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멀어졌지만 직감적으로 계원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돌아서면서 언뜻 비친 계원의 표정을 통해 내가 너무 교만한 인간이라고 느껴졌다. 이후 계원은 다시는 교회에 오지 않았고 나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다. 나도 그 이후 계원을 생각하지도, 잊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단지 나의 신앙이 조금씩 연단되면서 계원의 영혼에 상처를 준 것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다시 계원을 만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의사가 된 이후였다.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다. 인턴과 레지던트 시절을 보내고 두 아이의 아빠로서 전임 강사 시절을 보낸 직후였다. 어느 날 외래진료 중 밖에서 어떤 여자 분이 잠깐 만나도 되냐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계원을 아느냐고 물었다. 여성은 계원의 아내였다. 뜻밖이었다. 병원에 왔다가 내 이름을 본 것이다. 계원에게 내 이름을 많이 들었단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편 친구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니. 계원은 그 이후로도 어떤 모습으로든 나를 기억하며 자기 아내에게 내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계원과 나는 다시 연락이 닿았고 10여 년 전 죄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성의 있는 우정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몇 번의 실패를 디디고 안정된 사업을 하고 있으나 교회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계원은 여전히 부드럽고 온유한 성품으로 나를 편하게 대해주었고 예전의 섭섭함은 전혀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난 그의 영혼에 상처를 준 것을 보상하기 위해 기회를 기다렸다.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내게도 변화가 생겼다. 10년간 근무했던 교직을 떠나 의사이면서 성악가인 대학 친구의 개인의원을 봐주게 됐다.
그날도 진료를 하고 있었다. 전화가 왔다. 계원의 처남이라 했다. 얼마 전 계원이 갑자기 사망했다고 했다. 동해 바다에서 스킨스쿠버를 하다 사망했다는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제는 그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수도, 영혼의 빚을 갚을 수도 없게 된 것이다. 평생 지울 수 없는 마음의 부담감을 남겨둔 채 계원은 그렇게 떠났다.
지금도 그를 보고 싶다. 잔잔한 미소와 넓은 포용력을 느끼고 싶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도 교만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종종 튀어 나오는 나의 교만을 계원은 죽어서까지 보고 있을 것 같다. 계원의 죽음은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과 같이 나의 교만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계원의 죽음 이후 나를 성찰하려고 노력했다. 교만해지려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계원이 생각났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소외되고 약한 존재를 섬기는 것이라 인식하게 되었다. 그 후 미력이나마 약한 자와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말기 암환자를 섬기는 샘물호스피스 초창기에 실행위원으로 섬길 수 있었다. 이후 세계밀알연합회를 비롯해 청각장애인을 위해 수화를 배운 것도 그런 영향이다.
홍관수 원장
홍관수(56) 세실내과 원장은 1980년 가톨릭의대를 졸업한 내과 전문의(내분비-대사분과)다. 가톨릭의대 내과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대한내분비학회, 대한당뇨병학회 평의원, 미국 당뇨병학회와 국제 신장학회 회원이다. 샘물호스피스를 통해 말기 암 환자를 섬겼으며 현재는 청각장애인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동아방송예술대 교육이사로 오페라 해설가 및 아마추어 성악가로도 활동 중이다. 최근 에세이집 ‘나는 착한 아내가 싫다’를 펴냈다. 서울영동교회 장로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