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42) 기독교와 사회변화 <3>여성교육

입력 2011-12-18 17:51


“여성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아” 일깨워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됨으로써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여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였다. 당시 한국에서 여성은 별 볼일 없는 존재였다. 남녀유별(男女有別)은 차이의 개념이 아니라 차별의 훈계였다.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운명으로 여기며 가정에서의 천대와 사회적 차별, 그리고 현실의 제약을 받아들이고 살아야만 했다.

여성은 남성과 동일하게 교육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실학을 체계화한 인물이자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쓴 이익(1681∼1763)조차 여성(부인)은 “근(勤)과 검(儉)과 남녀유별의 3계(三戒)를 알면 족하다”고 말하면서 “독서와 강의는 장부의 일이니 부인이 이를 힘쓰면 폐해(弊害)무궁하니라”고 썼다.

기독교가 소개되기까지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이때까지의 여성 교육이란 안방(內房)에서 이뤄지는 유교 전통의 가정 중심의 부덕(婦德)을 강조하는 정도였다. “여성에게는 무식이 덕(德)이니라”고 여겼던 유가적 가부장적 사회구조 속에서 남존여비는 그 시대의 가치였다.

그 시대적 가치에 반해 여성도 남성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며, 여성도 교육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점을 일깨워준 것은 기독교였다. 이 점을 시위하기 위해 선교사들은 의도적으로 여성들을 위한 학교를 열었다. 그 일례가 경남지방에서 일했던 호주선교부가 처음 개교한 부산의 일신여학교였다. 고루한 마산에서 1908년 남녀 공학인 창신학교를 설립했다.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교육의 대상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였다. 당시 경상도 정서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반란이었다. 기독교는 여성의 권익은 교육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선교사들이나 교회는 여성 권리나 인권의 문제를 성경적인 인간관에서 찾았다. 즉 하나님은 남자든 여자든 구별 없이 동일하게 창조하셨다는 점을 지적했다. ‘조선그리스도인회보’에 게재된 ‘부부론’에서는 가정에서 부부 관계는 모든 사회 조직의 근간이 된다는 점을 말한 다음 이렇게 썼다.

“하나님이 남녀를 내실 적에 어찌 남자는 귀하고 여인은 천하게 하셨으리오. 구세주께서 가라사대 처음 만물을 지을 때에 하나님께서 남녀를 만드셨으니 이로써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한 몸이 된지라.” 또 “사람들이 흔히 알기로 남자는 아무리 불선한 일을 할지라도 그 아내가 책망하는 권리가 없고 여인은 조금만 예법을 어기면 그 남편이 꾸짖기를 마음대로 하는 줄로 생각한다”며 남녀 간의 불평등과 여성경시 풍조를 비판했다. 기독교회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남녀를 동일하게 지으셨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를 가르치고 계몽했다. 이런 교회의 가르침이 한국에서의 여권 신장과 여성 교육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서재필은 1897년 12월 31일 정동감리교회 청년회가 주최한 ‘남녀를 같은 학문으로써 교육하며 동등권을 주는 것이 가하다’는 제하의 토론회에서 남녀 간 차별을 문제시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생(生)하심이 무론 남녀하고 이목구비와 심(心)의 성정은 다 한가지이며 만물 가운데서 제일 총명하고 신령한지라. 동양 풍속이 어찌하여 사나이는 기와집과 같다 하고 여편네는 초가집과 같다 하여 남녀 간에 값이 높고 낮은 줄로 분별을 하는지 극히 개탄할 일이라. … 어찌 홀로 사나이만 학문을 배우며 권(權)으로 말할지라도 남녀가 다 같은 인품이라. 어찌 사나이만 사람의 권을 가지고 여편네는 사람의 권을 가지지 못하리오. … 여편네를 압제만 하며 지옥 같은 도장 속에 가두듯 깊이 감추어 두고, 학문도 배우지 못하게 하며 잘못하는 일이 없건마는 얼른하면 주먹으로 때리고 호령질하며 하등 인물로 대접하니 가탄가탄이로다.”

이 연설에서 서재필은 남성과 여성 간의 동등성을 말하면서 여성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 외국의 경우를 사례로 제시하면서 “대한 인민도 남녀를 같은 학문으로 교육하고 동등권을 주어 전국이 복음을 누리게 하는 것이 매우 마땅하다”고 가르쳤다. 당시의 장로교 계통의 ‘그리스도 신문’도 남녀 간의 평등을 가르치고 계몽했다. “남녀의 분간이 없이 자유하는 것이 이치의 당연함이어늘 이제 어찌하여 여자를 천히 여겨 남자에게 매여 지내되 평생에 자유하는 권이 없고 자주함이 없으니 다만 천리를 어길 뿐 아니라 인정에 합당치 못한 것이 많도다. 대제 상주(上主) 사람을 내실 때에 귀천과 남녀의 등분이 없이 하셨거늘 마땅히 권리를 좇을 것이요.”

‘대한그리스도인회보’에 두 차례 게재된 ‘여학교론’에서 남자들은 여자를 “인류로 치지 않고” 다만 남자를 따라다니는 “한 물건”이나 사나이의 노리개로 알기 때문에 조선 여성의 신세가 “초목과 금수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고 지적하고 이를 개탄하고 있다.

이런 교회의 가르침이 여성의 인권과 권익 신장에 영향을 준 것이다. 감리교회는 1895년 선교사 존스의 제안에 따라 첩을 둔 남자나 첩으로 있는 여성은 감리교 교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의를 한 일이 있고, 장로교회는 1901년 9월 20일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장로교 공의회에서 한국 풍속 가운데 고쳐야 할 네 가지를 제시했는데 조혼, 과부의 개가 금지, 결혼 지참금, 부녀자 압제 등이었다.

이런 일련의 활동을 통해 한국의 기독교는 여성의 인권, 사회적 지위, 여권 신장, 여성 교육 등 여성의 사회적 상황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의 전래는 안방으로 스며드는 한줄기 소망의 빛이었다.

(고신대 역사신학)